Page 186 - 오산문화총서 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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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가 완성되자 백성들이 찾아와 산성에 들어와 살면서 성을 지키겠다며 지원하였다. 단
시간에 백성들의 마음까지 되돌리는데 성공한 것이다. 변후는 독산성에 부임하여 ①성을 높
게 쌓고 ②해자를 깊게 파고 ③샘을 파고 ④밭을 일구었고 ⑤궁노(弓弩)·석거(石車)·포화(砲
火)·기계(器械)를 설치하고 ⑥날마다 군병들과 함께 공격과 방어를 준비하고 말타기, 활쏘기,
칼과 창 쓰기를 훈련하여 실전에 쓰일 수 있도록 하였다. 변후의 업적 중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독산성 주변 들판에 둔전을 건설하여 자급자족을 실현한 일이다. 한 해가 지나자 성안에 거주
하는 백성이 2백 호(戶)가 넘었다. 이러한 사실이 보고되자 조정에서 근신을 파견하여 호궤하여
군병들을 위로하고 그 기예를 시험하였다. 선조는 기뻐하여 독산성을 잘 축성하고 백성들의 지
지를 받는 방어사 변후에게 임금이 타는 말을 하사하여 격려하고 잘 따른 병사들에게도 포상을
내려 위로하였다. 이처럼 경기방어사 변후는 군병과 백성들의 마음 얻을 뿐 아니라 독산성을 경
기도의 큰 관문으로 만든 주역이다.
문무를 겸비하고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해 독산성을 요새로 건설한 변후의 주변 인물도 살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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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필요가 있다. 특히 그의 스승이 일재 이항(1499~1576)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1592
년 12월, 권율이 독산성에 고립되어 구원을 요청했을 때 의병장 변사정(1529~1596)과 임희진,
최철견이 출전하여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임희진은 김천일과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
했다가 전사하였고, 최철견은 1597년 말에 수원부사로 임명되어 1598년 7월까지 독산성을 관리
하였다. 문무를 겸전한 이들은 모두 일재 이항의 제자들이다.
18) 『선조실록』 68권, 선조 28년 10월 27일 병인 1595년
19) 일재(一齋) 이항(李恒)은 일찍부터 병학에 뜻을 두고 무예를 익혀 명궁의 경지에 올랐다. 30세가 되었을 때 학문을 익히기로
결심하고 도봉산 망월암에 들어가서 여러 해를 독학했다.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태인으로 내려가 농사지으면서 어머니를 봉
양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동시대 학자 백인걸은 이항의 학문이 남명 조식에게 비길만하다고 평가했을 정도로 학문에도 높
은 성취를 이루었다. 이항은 기대승ㆍ김인후ㆍ노수신 등 명유들과 사귀면서 학문의 깊이를 더했다. 퇴계 이황은 그를 높이 평
가했으나 지나친 자신감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항은 1566년(명종 21) 조정에서 뛰어난 선비를 뽑을 때 첫 번째로 추천되었다.
이항은 김인후, 기대승, 안방준, 박광일과 함께 ‘호남의 다섯 학자’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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