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82 - 오산문화총서 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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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1,004보에 이르는 성벽 대부분은 정조 16년(1792)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230년

               전의 독산성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기록에 따르면, 해발 208m의 독산에 테뫼식으로 축성된 독
               산성은 둘레가 1,004보(약 1.1㎞)이다. 동서남북에 4개의 성문을 비롯해 1개의 암문과 망을 보
               고 공격하기 좋도록 설치한 8개의 치(稚)가 있었다. 그렇다면 당시 산성에 장용영 군사들이 얼

               마나 주둔했고, 성안에 어떤 시설물들이 있었을까? 성가퀴[垜]가 허물어져 모두 흩어지고 진남
               루와 운주당을 비롯한 주요 시설물이 서 있던 곳도 공터가 되어버린 상황이니 당시의 모습을 지

               금 상상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진남루와 운주당을 비롯한 여러 시설물이 서 있는 멋진 풍경
               을 자주 그려보아야 한다. 머잖은 날에 이러한 상상은 현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독산성의 역사를 다룬 「진남루기(鎭南樓記)」와 「독성산 중수기(禿城山重修記)」는 복원을 위해

               꼼꼼하게 살펴야 할 사료이다. 이 글은 두 가지 글을 통해 독산성의 변천 과정을 더듬으며 관
               련 역사와 인물들을 살펴본 것이다. 독산성과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유물 못지않게 중요하
               다. 「진남루기」는 선조 36년(1603)에 경기방어사 변후(邊侯, 변응성, 1522~1616)가 월사 이정

               귀(1564~1636)에게 부탁하여 지은 글이다. 150년이 지난 영조 29년(1753)에 지어진 것이 「독성
               산 중수기」이다. 이 글은 중영장(中營將) 김경유(金景游)가 기둥과 계단이 낡아 사용하지 못하
               던 진남루를 수리한 것을 기념해 수원부사 이의풍의 부탁을 받은 평택의 유학자 사양재 강호보

                                       1)
               (1690~1778)가 지은 것이다.  옛 사람들이 진남루를 중심으로 독산성의 역사를 살폈다는 사실
               도 흥미롭다.








               Ⅱ. 독산성을 주목한 사람들





                                                                                        2)
                「진남루기」는 독산성에 진남루가 세워지기까지의 과정을 월사 이정귀가 정리한 글인데  선조
                                         3)
               36년(1603) 가을에 완성되었다.  경기방어사 변후(변응성)가 누각을 세우고 ‘진남루’라 이름 짓




               1) 이에 관한 글과 번역문이『오산문화 67호, 2019』에 실렸다. 사양재(四養齋) 강호보(姜浩溥) 선생이 ‘독성산 중수기’란 글을 지었
                다는 사실을 최초로 알려준 소중한 글이다. 다만, 번역문을 살펴보니 몇 곳에서 오역이 발견되어 다시 번역해서 싣는다.
               2) 이식, 신흠, 장유와 함께 한문 4대가로 꼽히는 이정귀는 빼어난 문장력으로 임진왜란 때 외교관으로 활약한 문인이다. 변후는
                월사 이정귀의 외삼촌이다.
               3) 만력(萬曆) 31년 계묘(1603, 선조36) 계추(季秋)



               180  김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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