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84 - 오산문화총서 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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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서애 유성룡과 방어사 변후(변응성)
이정귀의 「진남루기」에 임진왜란 때 선조와 서애 유성룡을 비롯한 조정의 대신들이 독산성을
어떻게 인식하고 관리했는지 잘 알려주고 있다.
이듬해(1593년) 적이 퇴각하여 [남해안에] 진지를 구축하자, 조정에서는 이곳의 산성을 보수하여 적을
막을 계책을 서둘러 강구하였다. 주상께서 먼저 독성(禿城)에 관해 물으셨고 도체찰사 서애 유성룡과
5)
경기관찰사 서경(西坰) 유근(1549~1627) 이 실로 이 계책에 찬성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방어사 변후
(변응성,1552~1616)에게 명하여 이 성을 순시하게 하는 한편, 면포 수백 필을 하사하여 편의를 보아 주
었다. 변후가 사수(射手)로 쓸 군사를 모집하고 장정 5백 명을 뽑아 왕명으로 상을 내리고 주둔하는 군
사로 삼는 한편, 그 사실을 임금께 아뢰면서 이 성은 지켜야 할 곳이라고 힘써 말하였다. 이에 주상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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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긍하시고 드디어 유사(有司) 에게 명하여 일을 착수토록 하셨으니, 비록 크게 일을 벌이지는 않았으
나 이 성은 이때 처음 만들어졌던 것이다.
7)
도체찰사 서애 유성룡(1542~1607)이 독산성을 주목했다. 독산성은 경기남부에서 방어시설
을 제대로 갖춘 유일한 산성이었다. 하지만 이후 관리가 잘 이루어지지 못했다. 1594년 가을,
경기도 일부 백성들이 무장을 하고 관아를 공격하고 고을을 약탈하고 장수를 죽이는 반란이 일
어났을 때 반란군이 독산성에 웅거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아 선조가 불안에 떨었다는 기사가
8)
이러한 사정을 알려준다. 이 사건으로 조정에서 독산성을 관리하자는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
때 직접 독산성을 방문한 유성룡은 성을 튼튼하게 보수하고 무기를 갖추면 수원부민들이 들어
5) 유근(柳根, 1549~1627) 호는 서경(西坰). 1572년(선조 5) 별시 문과에 장원하고 사가독서를 하였다. 1587년 이조정랑으로서
문신 정시에 다시 장원하였다. 이 해 일본의 중 겐소가 사신으로 오자 선위사에 특임되어 사신을 대접하였다. 1591년 좌승지
세자를 세우는 문제로 정철이 화를 당할 때 일파로 몰려 탄핵을 받았으나, 문재(文才)를 아끼는 선조의 두둔으로 화를 면한다.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임금을 호종했으며, 예조참판에 특진되었다. 1593년 도승지로 경성안무사(京城安撫使)가 되어 도성의
민심을 수습하고, 한성부판윤에 올라 사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명나라에 두 차례 다녀왔고, 호성
공신 2등에 녹훈되고 진원부원군(晉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충청도관찰사, 예조판서, 대제학, 좌찬성을 지냈다. 정묘호란 때 강
화에 왕을 호종하다가 죽었다. 문집 『서경집』을 남겼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6) 유사(有司)는 경기도관찰사 유근을 말한다.
7) 『선조실록』 선조26년(1593 계사) 10월 22일(임인)
8) 『선조실록』 선조27년(1594 갑오) 9월 27일(임인)
182 김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