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81 - 오산문화총서 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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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독산성 복원의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할까
독산성은 부활을 꿈꾸고 있다. 가까운 어느 날에 성벽 위로 성가퀴가 올라갈 것이고 진남루
(鎭南樓)와 운주당(運籌堂)을 비롯한 건축물이 들어설 것이다. 옛 모습을 되찾는다면 독산성은
세계인들에게 사랑받을 것이다. 왜 이렇게 단언하는가? 우리는 이미 화성과 남한산성의 변신을
지켜보았다. 두 성 역시 오랫동안 허물어진 채로 방치되었으나 시민들의 노력과 행정 당국의 결
단으로 새롭게 단장하여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이처럼 남한산성과 화성은 독산성의 장래
를 알려주는 훌륭한 모델이다. 그러나 두 성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치명적인 잘못이 발견된다.
이러한 잘못은 답습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경계해야 할 것이다. 화성행궁은 <화성성역의궤>와
주춧돌 및 옛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 등 자료가 풍부했지만, 재현에 실패했다. 건립 당시의 건물
인 낙남헌이 원형으로 보존되고 있음에도 바로 곁에 복원한 건물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둥글어
야 할 기둥은 사각이고, 주춧돌과 기둥의 높이도 한참 낮다. 공을 들였으나 행궁이 갖추어야 할
권위와 품격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 왜 이처럼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을까? 기준을 잘못 세
웠고, 관리 감독을 잘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산성 복원에 앞서 충분한 논의와 철저한 연구
가 이루어져야 한다.
『삼국사기』에 온조왕 11년(BC 8년) 백제가 독산에 목책을 설치했다는 기록은 독산성이 얼마나
오래된 요새였는지를 알려준다. 신라 제17대 내물왕시대(재위 356~402)에 백제의 독산 성주
(城主)가 300명의 주민을 이끌고 신라에 투항하자 받아주었다는 기록은 이 산성을 차지하려 삼
국이 얼마나 치열하게 경쟁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주변에도 독산(禿山)이란 지명이 존재하
기 때문에, 오산 독산성이 『삼국사기』에 실린 독산성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2019년
11월, 발굴조사단이 독산성에서 삼국시대에 쌓은 성벽의 일부를 발굴하였다. 1970~80년대에
복원한 성벽 아래에 조선 후기와 전기의 성벽, 통일신라시대의 성벽, 삼국시대의 성벽이 차례로
확인된 것이다. 6세기 후반에 성벽을 처음 쌓았으며, 7세기 중반에 크게 고쳐 쌓은 것으로 보고
있다.
독산성을 복원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첫째, 독산성을 싸고 흐르는 황구지천은
19세기까지 사람과 물자가 드나드는 중요한 수로였다는 사실이다. 둘째, 정조 13년(1789)까지
독산성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수원부 관아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인지해야
독산성이 왜 중요한 산성이었는지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
던 삼국시대에 축성되어 1700~1600년의 긴 세월을 이어오는 동안 성벽은 보수와 단장을 거듭
독산성 복원을 향한 첫걸음 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