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88 - 오산문화총서 7집
P. 188
었다.
괄호 안에 기록했듯이 대부분 임기를 1년도 못 채우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변후는 1602년 2
월에 부임하여 1604년 7월까지 2년 넘게 재직하였다. 그만큼 변후의 지도력과 역량이 탁월하였
다. 이 무렵 왜적이 다시 침략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아 조정의 분위기조차 뒤숭숭했다. 이
러한 때에 독산성을 경기도와 한양을 방어하는 요새로 삼자는 논의가 다시 일어났다.
Ⅵ. 윤두수와 변후
독산성의 전략적 가치를 주목하고 있던 전 영의정 윤두수(1533~1601)는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인 1601년 3월에 국방에 관한 견해를 밝힌다. 첫째, 독산성과 수원관아를 튼튼하게 보수할 것
둘째, 평안도 영변과 경성처럼 독산성에도 병마절도사를 보내 방어사로 삼아 겸임토록 할 것을
22)
요청한 것이다. 종2품의 병마절도사를 독산성에 배치하여 관리하라는 윤두수의 충언은 상당
히 파격적이다. 윤두수는 “수원에 정예병 1천 명이 있고, 독산성과 같은 요새지가 있으니 성에
병영을 설치하고 명망 있는 지휘관을 파견하고 비변사 둔전의 곡식을 제공하여 군사를 양성하
23)
면 효과가 좋을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윤두수의 적극적인 제안으로 독산성의 재원과 병력을
마련하는 세부 지침이 마련되었다. 도성을 지키러 올라가는 육군과 한강가의 창고에 운송되는
세금을 면제하여 모두 독산성에 소속시켜 병력과 군량으로 삼도록 한 것이다. 문무를 겸비하여
위풍을 갖추고 실무에 익숙한 사람을 선발하도록 논의했는데, 변후가 다시 방어사에 임명되었
다. 이정귀는 변후가 진남루를 건설한 과정을 이렇게 전해준다.
변후가 성의 남쪽 모퉁이 깎아지른 벼랑, 깊은 골짜기 위에 초루를 세워 나그네들이 모이는 곳으로 삼
았는데, 제법 넓고 전망이 틔어 좋았다. 진남루라 명명하고 나에게 기문(記文)을 지어 달라고 청하기에
이 성이 세워진 전말을 적어서 주노라.
22) 『선조실록』 135권, 선조 34년 3월 17일 을묘 4번째 기사 1601년
23)『선조실록』 선조34년(1601 신축) 3월 17일(을묘)
186 김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