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2 - 오산문화총서 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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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8일 동안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청의 기마병이 넘어올 말구리, 소말구리, 도마치에 목책(木柵)을 세우고 대비하였다. 1열에 조
               총수를 세워 조총과 탄약을 준비하고, 2열에 궁수를 두어 활과 화살을 준비하고, 3열에 창검병
               을 두어 창검과 방패로 무장하였다. 만일을 대비하여 산 능선의 곳곳에 마름쇠(蒺藜鐵)를 깔아

               기마병의 접근을 막고, 돌탑을 쌓아 투석전(投石戰)에 대비하였다.
                김준룡 장군은 광양현감 최택에게 1,000명의 군사를 주어 수리봉을 지키게 하고, 병조좌랑

               박의에게 700명의 군사를 주어 형제봉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총사령관으로 보령 무장 인발과
               함께 500명의 군사로 종루봉(중앙봉)에 올라 전투를 지휘하였다.



                (2) 12월 30일~1월 5일, 청군 사령관 다탁은 진재산 대장동에 진지를 구축하고 좌익장 양구
               리는 안재산 금곡동에 진을 쳤다. 금곡동에 대장간을 설치하여 무뎌진 병장기를 수선하였다. 홍
               이포, 조총과 탄약, 칼과 창, 활과 화살, 도끼와 철퇴 등으로 무장하고 전투를 준비하였다.



                (3) 1월 6일, 광교산 전투가 시작되었다. 간밤에 눈이 내리고 운무(雲霧)가 끼어 지척을 분간
               하기 어려웠다. 전투의 시작에 앞서 청군은 운재산에서 광교산를 향하여 홍이포(紅夷砲)를 여

               러 발 쏘았다. 대포를 쏘아 전라근왕병의 사기를 단번에 꺾으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대포 소리
               만 요란했을 뿐 전라근왕병에게 큰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먼 거리에 안개가 자욱하여 홍이포

               의 포탄이 적중하지 못하였다. 청군이 쏜 대포 소리는 청의 기마병이 돌진한다는 신호탄이 되었
               을 뿐이다.
                청의 선발대 60~70명의 기마병은 말구리, 소말구리, 도마치 돌파에 전력투구하였다. 그러나

               말구리, 소말구리, 도마치에 마름쇠(蒺藜鐵)를 깔고 목책(木柵)을 세워 사수하는 전라근왕병의
               방어진을 뚫지 못하였다. 전라근왕병이 쏜 조총에 청의 기마병 수십 명이 사살되었다. 이후 청

               군의 기마병이 구른 고개의 이름은 말구리, 소말구리가 되었고, 말의 시체를 묻은 배나무골에는
               말무덤이 생겼다. 청군의 좌익장 양고리가 칼을 들고 말을 타고 공격한 고개는 도마치(刀馬峙)
               가 되었다.


                (4) 당일 오후, 청군은 형제봉, 종루봉(중앙봉), 수리봉을 방어하는 전라근왕병을 협공하였다.
               청군 사령관 다탁은 말구리, 소말구리, 노루목 능선을 따라 시루봉과 수리봉을 공략하였고, 좌

               익장 양고리는 도마치 능선과 서봉천(現 신봉천)을 따라 형제봉과 종루봉을 공략하였다.






               110  임종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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