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6 - 오산문화총서 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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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근왕병이 머물던 수원시 광교동과 우만동에는 주인 잃은 말과 소가 겨울 들판에 떨고 있었다.
(17) 청군 사령관 다탁이 용장 양고리와 몽골 장수 2명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또 어제 죽은 청
군의 시신 수천 구를 모아 불태우고 서봉사 동쪽 골짜기에 묻었다. 이후 이 골짜기의 이름은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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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매골(暗遷埋谷) 이 되었다.
또 전라근왕군의 군자기계를 보급하던 우마차의 소와 말 1,140필을 노획하여 진지로 돌아갔
다. 소는 잡아 청군의 부족한 식량으로 쓰고 말은 끌어 청군의 마차에 대용하였다.
청군의 진지로 돌아가던 호로군이 서봉사의 스님들을 살해하였다. 전라근왕병을 도운 분풀이
였다. 사지를 찢어 나뭇가지에 매달고 창성사와 성불사, 서봉사를 불태웠다. 이 일로 서봉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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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골짜기에 송장거리 라는 지명이 생겨났다.
(18) 청 태종 황타이지가 매형 양고리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자신의 황룡포(黃龍袍)를 벗어 양
고리의 시신을 덮고 사흘 밤낮을 울며 식음을 전폐하였다. 이에 예친왕 다탁 이하 장수들이 황
타이지의 심신을 염려하여 극구 말려 겨우 진정되었다.
(19) 1월 22일, 청군이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충청 수군의 방어를 뚫고 한반도 최고의 요새인
강화도 염하를 도강하였다. 청에 망명한 노비 정명수 등이 썰물 때에 작은 배로 염하를 건널 수
있는 정보를 알려 주었다. 청군의 도하에 강화도 검찰사 김경징과 강화 부사 이민구가 죽음이
두려워 먼저 도망하였다. 강화산성이 점령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이하 비빈들이 청군에 포
로로 잡혔다.
(20) 청 태종 황타이지의 권유에 조선왕 인조가 항복 의사를 밝혔다. 세자와 왕자가 붙잡힌
마당에 더이상 버틸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조선왕 인조는 곤룡포를 벗고 말에서 내려 삼전도에 나아갔다. 계단 아래에 엎드려 청 태종
황타이지에게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로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 이후 조선은 청이 요구한
군량과 세포, 탄환과 화약 등의 군자기계(軍資器械) 징발에 시달렸다. 청은 몽골에서 얻은 병력
과 조선에서 충당한 군자기계로 명을 공격하여 중원의 패자가 되었다.
62) 암천매골(暗遷埋谷),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 산.
63) 송장거리,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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