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1 - 오산문화총서 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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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53 수지구청 119 구급대                  도-54 기러기 떼






                Ⅳ. 맺음말





                 징전비후(懲前毖後)의 반성이 없었다. 임진왜란의 처절한 사태를 겪고도 조선 정부는 ‘앞의
                일을 반성하여 뒤의 일을 경계한다’는 정직한 반성이 없었다. 징비록(懲毖錄)을 써서 남긴 서애

                류성룡의 충고는 사장되었고, 난중일기(亂中日記)를 써서 남긴 이순신 장군의 일기는 새겨 읽지
                않았다.
                 조선 정부는 권력에 눈먼 사림파와 훈구파의 세력 다툼으로 날을 지샜다. 백성의 믿음을 잃은

                왕의 위세는 땅에 떨어졌고 권력에 취한 대신들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등에 업었다. 그러
                고도 인조반정의 공신들은 논공행상에서 패가 갈려 또 싸웠다. 급기야 조선 정부는 이괄의 난을

                초래하였고, 이괄의 난의 여파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불렀다. 동아시아의 정세를 무시하고
                明과 연합하여 淸을 징벌해야 한다는 친명배금의 논리를 고집하였다. 내우외란이었다.


                 사거용인(死居龍仁)에 눈을 감았다. 너른 들과 하천이 맑은 진천은 산 자가 농사짓고 살기 좋
                은 땅이다. 산이 높고 언덕이 많은 용인은 죽은 자의 묘지 쓰기 좋은 땅이다.

                 용인에는 고려시대의 충신 정몽주, 대마도를 정벌한 장군 이종무, 정묘호란에 순절한 장군 이
                완, 개혁을 부르짖은 정암 조광조,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건설한 번암 채제공 등의 묘소가 위치
                한다. 이른바 생거진천의 명당이 아니라 사거용인의 명당이다.



                                                              광교산전투, 김준룡장군 전승지 답사기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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