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9 - 오산문화총서 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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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었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가치와 형식을 중시한 조선의 패배였다.

                 청은 팔기군을 앞세워 몽골과 조선과 명을 제압하고 중원의 패자가 되었다. 유교 국가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청은 몽골의 말과 기병, 조선의 군량과 무기를 약탈한 도적 떼일 뿐이다.  북방
                호로새끼들이 일으킨 전란이었다. 그래서 청조전쟁이 아니라 끝까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었

                다.
                 청 황실과 귀족은 중원의 통치자가 되고도 말 타고 사냥하는 행사를 그치지 않았다. 청을 건

                국한 근본정신이 상무(尙武)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왕과 대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도 예송 논쟁을 그치지 않았다. 조선을 건국한
                근본정신이 성리학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동아시아의 시대 상황과 동떨어진 결정을 반복하였

                다. 예를 들면 청의 호렵도(虎獵圖)를 조선은 호렵도(胡獵圖)로 불렀다. 호랑이를 사냥하는 그림
                이 아니라 호로족(胡虜族)이 사냥하는 그림이라고 낮잡아 불렀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이 시대
                정승들의 墓碑다. 묘비의 첫머리에 예외 없이 有明朝鮮國이라는 자귀가 등장한다. 명나라 속에

                조선국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이 중국의 동북공정을 부정하면 중국은 각종 비문의
                ‘유명조선국’을 들이댈 것이다. 답답하고 우울한 실상이다.
                 병자호란 이후 실사구시의 학문이 점차 활기를 되찾았다. 서양의 자연 과학과 천주교 사상,

                양명학과 고증학을 수용하는 실학(實學)이 점차 성리학을 밀어냈다.
                 청 태종 황타이지의 배포가 대단하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질과 적지를 두 번이나 다

                녀간 그의 용맹함이 돋보인다. 황타이지의 초상에서도 다부진 체격에 날카로운 눈매가 느껴진
                다.
                 황타이지가 입었던 황룡포에는 卍자와 壽자가 수놓아졌다. 광교산 전투에서 전사한 매형 양

                고리의 시신을 덮어 주었던 비단옷이다.
                 卍는 영원불멸의 상징이기도 하다. 흔히 인도와 중국의 불교에서 시작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기원전 7~8세기 유럽의 고대 국가에서 이미 사용되었다. 로마에 앞선 나라 에트
                루리아의 문장(紋章)으로도 쓰였다. 성터, 물그릇 등에 새겼으며 죽은 자의 뼈항아리에도 새겨
                부활을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히틀러도 卍문양을 차용하였다.



                 2021년 11월 5일, 광교산 포럼 일행은 광교산을 다시 찾았다. 고기동에서 노루목으로 이어지
                는 큰골로 들어섰다. 앞장서서 큰골을 안내하던 『수지 향토문화사답사기』의 저자 이석순 님이

                가파른 산길에서 굴렀다. 119 구급차를 급히 불러 서울 중앙보훈병원 응급실로 달렸다. 그때였
                다. 하늘에 한 무리의 새떼가 까맣게 날아왔다. 먹을 것을 찾아 북쪽의 동토에서 따뜻한 남쪽 나



                                                              광교산전투, 김준룡장군 전승지 답사기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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