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75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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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공영주차장, 이 자리에는 집들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노인정 자리 에는 상가들이 빼곡히
                있었다고 회상한다. 정사장이 이사 왔을 당시 삼형제가게라고 포목점이 있었고, 포목점이 총 3
                군데나 되었다 한다. 금성상회라는 양복점도 있었다고 하며, 송씨네라고 고무신가게도 있었다
                고 한다. 이 부근 모든 지역이 상가로 꽉 찼다고 한다. 장날이면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

                은 그 많던 사람들이 없다며 아쉬워한다. 국수 공장은 1976년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공장을 처
                음 시작하던 당시에는 무척 어려웠다고 한다. 아무 것도 없이 맨 몸으로 와서 무척 고생했다고

                한다. 국수 공장이 자리 잡고 장사가 제법 되기 시작한 때가 1980년대부터였다. 이때는 주식이
                국수일 정도로 밀가루 제품을 많이 먹었기 때문에 만들어 놓을 시간이 없어서 못 팔았다고 한
                다. 그것도 지금은 쌀이 주식이라 매출이 확연히 줄어 근근이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그때가 좋

                았던 시절이라고 기쁜 미소를 보인다. 당시는 쌍용제면이라는 상호였는데, 쌍용그룹에서 운영
                하는지 알고 기부하라는 전화를 많이 받았다고도 한다. 지금은 현 상태에 만족한다고 한다. 사
                람 욕심이란 것이 한도 끝도 없는 것 아니겠느냐고 하며 만족해한다. 처음 시작할 때 자부심은

                없었지만 늘 열심히 만들었다고 한다. 언제든 내가 먹을 수 있는 제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게
                장가네국수 맛의 비결이라 한다.



                4) 금성장의사



                 한 세기에 가깝게 할아버지 때부터 대를 이어 해 왔다고 한다. 금성장의사 대표 김영호 사장
                은 평소에 취미로 아코디언, 색소폰, 기타 연주와 스포츠를 즐기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는
                봉화 1봉송주자로도 활약하였다. 아버지의 손때 묻은 자와 오래된 미싱 등 오래된 물건들이 많

                다고 한다. 아버지가 1950년부터 가업을 이었는데, 김영호 사장은 1975년부터 돕기 시작했다
                고 한다. 40여년이 지나고 있다고 한다. 집안이 3대에 걸쳐 주단포목과 잡화 판매부터 시작해

                서 장의 일을 해왔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3대에 걸쳐 근 100여년의 역사를 갖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전에는 여기가 정말 노른자 땅이었다. 오산의 명동이다. 한 예로 예전에는 오산
                에 전화가 100번까지 밖에 안 나왔다. 전화교환사가 있었던 시절이다. 100번은 우체국 전용 번

                호였고, 1번부터 99번까지 전화번호를 가진 사람들이 다 이 골목에서 살았다 한다. 부자들만 살
                았던 골목이었다. 그 당시 금성장의사 전화번호가 43번이었다. 또 그 당시에는 여기 주변이 오





                36) 오산오매장터 재생 사업으로 이곳은 세시봉거리로 편입되고, 노인정은 인근으로 이전된다. 노인정 자리는 한때 미시장이기
                 도 한 곳이다.


                                                                   오산장(烏山場)의 역사성과 변천  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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