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72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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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무단침탈과 억압은 민족의 자존적 존립에 매우 큰 타격을 주었으며, 광복한 지금도 남

               북 분단이란 고착적인 민족의 대립의 부작용을 겪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3·1절을 맞이하는 자
               세에는 이러한 우리의 반성과 극복하려는 강한 의지를 되새기는 계기로 삼는 기념일이 되어야
               하겠다. 당시 오산독립만세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신 분들의 추모비가 아래뜰공원에 세워져

               있으며, 오산장터(오산오매장터)에는 오산3·1운동발상지 표식동판과 표지판이 설치되어있다.



               2. 김구 오산장에서의 흔적


                백범 김구의 『백범일지』 「삼남견문록」에는 오산지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날로 동적강(銅赤江)을 건너 삼남지방으로 향했다. 그때 내 마음이 매우 울적하여 승방(僧

               房)뜰에서부터 폭음을 시작했다. 밤낮으로 계속 술을 마셔대면서 과천을 지나 겨우 수원 오산장
                                                                                      31)
               (烏山場)에 도착하자 한 짐이나 되었던 노자가 다 떨어지고 말았다. 오산장 서쪽 동네 에 김삼
                                                                              32)
               척(金三陟)이라는 사람의 집이 있었는데, 주인 영감은 전에 삼척영장(領將) 을 지낸 사람이었
                                               33)
               다. 아들 여섯이 있었는데, 그중 맏아들 이 인천항에서 상업을 경영하다가 실패한 관계로 인천
               감옥에서 한 달가량 고생한 적이 있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 나를 몹시 사랑하였는데, 자기가 방

               면될 때에도 차마 헤어지기 힘든 마음에 뒷날 다시 만날 것을 굳게 약속한 터였다. 그 집에 찾아
               가서 그들 여섯 형제와 같이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며칠을 보냈다. 약간의 노자를 얻어가지고
               공주(公州)를 지나 은진(恩津) 강경포(江景浦)에 있는 공종열(孔鍾烈)의 집에 찾아 들어갔다.”



                위 기사의 내용은 백범의 나이 39세 때인 1914년 인천 감옥으로 이감되고, 40세가 되던 해인

               1915년 8월에 가석방되어 출옥한 직후 이야기이다. 그가 가석방되어 오산에 머물던 내용으로
               아마도 오산장에서 김동훈 형제들과 오산장 고수막거리 어느 술집에서 술을 마시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31) 동네 이름은 잊었다한다. 필자는 오산장 서쪽 동네를 오산시 남촌동의 남촌마을로 보고 있다.
               32) 영장은 감영이나 병영에 딸린 각 진영의 무관직 벼슬인 진영장의 준말이다.
               33) 국사 원본은 김삼척의 맏아들 이름을 김동훈이라고 적고 있다.



               270  남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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