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76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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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장터(오산오매장터) 빼고는 다 허허벌판이고 논밭이었다 한다.



               5) 협동방앗간



                오산장터(오산오매장터)에서 영업한 지 5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1988년부터 현재 이곳에서
               영업을 해 왔다. 그 이전에는 저 위쪽 편 노인정 자리에서 했다고 한다. 거기가 옛날 싸전이었

               다. 1970년도일 것이다. 정직하게 운영하므로 손님들도 믿고 다 맡겨놓고, 다 만들어간다. 속이
               거나 그러면 이렇게 맡겨놓고 찾아만 가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많은 단골들로 잘 운영
               되고 있다. 시어머님 김윤석사장과 며느리 안현순님의 호흡으로 명성을 이어간다.



               6) 생선가게 화신



                옛 오산장터(오산오매장터)의 황금기 때 어물전은 대단한 인기가 있었다. 제사, 잔치 등도 그
               당시에는 집에서 음식을 장만하던 시절이라 생선은 필수품이나 같았다. 화신의 조태복사장도
               6·25이후부터 시작했다. 부모님의 가게를 물려받아 생선가게를 운영해온 것이 지금까지 하고

               있다. 60여년이상의 역사를 가진 것이다. 그 당시 오산장터는 가장 큰 시장이었다고 기억한다.
               오산장터 내에서도 뒷골목에 있던 진전 골목이 생선, 건어물도 파는 곳이었다. 진전골목은 노점

               이 서고 포장마차에서 국밥을 끓여서 팔고 그랬다. 그 당시 송탄, 서정리 그런데서 순대국을 파
               는 상인들이 부대의 소시지, 햄과 돼지 부속물들로 끓인 꿀꿀이죽을 포장마차에서 팔았다. 그러
               면 오산장에서 시장을 본 분들이 한 그릇씩 사먹곤 했다. 그 당시 농사짓는 분들에겐 보약이나

               다름없었다. 그 당시 육류 섭취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5일에 한 번씩 꿀꿀이죽을 사먹고, 생
                                                                                      37)
               선은 사가지고 갔다. 그 당시 노인정 자리가 미시장, 즉 싸전거리였다. 첫 미시장 위치 는 현재
               한흥철물 뒤편이었으나, 그 후 노인정 자리로 이전된 것이었다. 이곳이 오산오매장터의 중심이
               었다. 생선장사 등 무슨 장사든 모두 옛날엔 모두 힘들었다. 그런데 생선장사가 더 힘들었던 이
               유는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얼음공급도 원활하지 못했기에 생선의 신선도가 떨어졌다.

               그래서 그때는 판매량의 반은 변질된 것을 팔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소금이 있어 다행인 시절
               이었다. 물건이 변질되기 전에 소금에 절여 판매했다. 젓갈도 판매했다. 특히 새우젓은 모든 음
               식에 간 맞추고 하는데 썼다. 생선구이 냄새는 그 당시 시장에 시장 끼를 돌게 하는 군침 나게




               37) 1919년 당시에는 현재 한흥철물 뒤편이었다.



               274  남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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