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78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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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은 아버지가 6·25 후부터 오산장터에서 시작하신 어물전에서 오늘날의 만복슈퍼까지 오
산장터를 지키고 있다. 장사를 시작할 당시 장터에는 6·25이전부터 어물전을 하고 있던 상인
이 세 명 있었는데, 오산장터에는 가게라고 부를만한 점포를 가진 곳은 네 뎃 곳에 불과했다고
한다. 오산장터 하면 3, 8일에 장이 서는데, 보통 넓은 마당에 장돌림들이 짐을 풀어 놓고 장사
를 했었기 때문에 장터에 점포를 두고 운영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고, 국밥과 국수도 장날 장이
서 사람이 많이 모일 때만 했다고 한다. 장터의 국수는 비교적 저렴하여 많이 사먹었다고 한다.
1980년대까지 오산장터의 상인들은 장사가 잘 되는 장날의 수입으로 나머지 날의 수입을 메웠
다고 하는데, 장날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지 상상이 간다. 오산장터는 예전부터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장터였는데, 당시에는 길이 많지 않았기에 어물전과 싸전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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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는 길이 오산장터의 중심이었다. 1978년에 착공한 산업도로 가 1981년에 개통되면서 교통량
이 늘어나자 1980년대부터 주변으로 길이 나기 시작했다. 또, 버스정류장이 새로 난 길에 생기
면서부터 유동인구의 시장 유입이 분산되면서 오산장터 중앙로로 다니게 않게 된 것이다.
9) 오산식품
오산장(오산오매장터)에서 3대에 걸쳐 가게를 운영하였다. 60년이 넘는 기간이다. 현재 어머
님 최병훈님, 아들 김유훈사장이 같이 운영하고 있다. 오산식품의 시작은 원산에서 사셨던 할아
버지가 6·25이후에 오산으로 이주 오산장터에서 장사를 시작하셨다.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도
와 일을 했다. 처음에는 노점형태로 시작했다. 그렇게 하여 지금의 오산식품이 되었다. 오산식
품이 있는 곳은 오산장터의 중심이었다. 장날이면 대단했다. 오산식품가게에서는 전통잔치와
모든 상차림의 물품들을 판매했다. 장날이면 줄을 서서 사가지고 갔다. 김유훈사장도 아버지를
도와 소매부터 하다가 지금의 도매상으로 변경한 것이다. 이제는 경조사 모두를 집 밖에서 치루
면서 식료품을 납품하는 도매상으로 변경한 것이다. 현재 예전과는 상황이 많이 변하여 김유훈
사장도 자식에게 물려주기는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계속 이곳을 지킬 수 있었으면
한다. 3대째 가업이기도 하고 고향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곳을 지키고 있던 분들이 한명, 두 명
자꾸 떠나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한다. 상황이 어려워져 변화에 적응해야하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다.
38) 현 1번국도, 경기대로.
276 남경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