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71 - 오산학 연구 4집
P. 271

작되었고 이후에는 오산장에서 좀 더 조직적으로 농민과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오산주민 모두

                가 적극적으로 참여한 빛나는 독립운동이었다.
                 이 오산장 시위는 발안장 시위와 함께 경기도 지역 전체로 만세 시위를 전파시키는 역할을 하
                였다.

                 이 오산의 만세운동이 벌어진 뒤 곧바로 다음날에는 권율의 세마대첩으로 유명한 곳인 독산
                성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는데, 오산지역의 양산동 주민, 산성면 주민 수백 명이 모여 대한독립

                만세를 부른 것으로 파악되는데 일제히 불을 밝히고 만세의 함성을 소리 높여 일제에 항거한 것
                이다.
                 오산지역이 타 지역보다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이 펼쳐진 배경에는 오산지역의 교육열을 들 수

                있겠다. 오산은 일찍부터 학교가 설립되었는데 사립학교인 신명학교가 있었다. 일제는 이 학교
                를 폐쇄시키고 1913년 4월 1일 오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를 개교시킨다. 학교가 타 지
                역보다 일찍 존재한 것은 교육열이 높았음을 추정할 수 있겠다. 또 다른 배경은 천도교의 교세

                가 있었음을 배경으로 한다. 천도교인들이 만세운동에 많이 참여하였음은 이로 알 수 있겠다.
                1905년에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오산지역도 농업적인 경제침탈이 가속화되었고, 이러한 사안도
                만세운동의 배경으로 볼 수 있겠다.
































                3·1독립항쟁의사추모비, 오산의 3·1독립만세운동을 벌인 의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추모비로서 오산역 광장에 세워져 있었다가 현재는 오산대역 앞 아래뜰공원으로 이전되어 있음




                                                                   오산장(烏山場)의 역사성과 변천  269
   266   267   268   269   270   271   272   273   274   275   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