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70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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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지역의 3·1독립만세운동은 3월 14일 오산장에서 시작되어 3월말까지 진행되었는데, 일
경들의 감시가 심하여 결정치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3월 29일(당시 음력 2월 28일-당시는
음력으로 3, 8일에 오산장이 열렸다.) 오산장날에 거사 일을 정하고 동지들에게 각 동리에 연락
을 취하게 하였다.
그러다 3월 25일 오산리의 만세운동이 젊은 학생들과 천도교도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
해 금융조합과 일본인, 중국인 가옥을 파괴하며 전개되었다. 이때 일경이 총을 발사하여 3명의
총상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후 오산리에서 3월 29일 오후 5시경 장날을 이용해 만세운동이 대
규모로 벌어졌다. 오산장에 모여 있던 300여명의 군중들을 유진홍(兪鎭弘)과 안낙순(安樂順)
등이 태극기를 휘두르며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이끌었다. 이들은 시장에서 출발
하여 성호면사무소와 오산경찰주재소 부근에서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을 펼쳤다. 당시 현장에 있
던 오산주재소의 순사 오오키(大木喜市)가 유진홍 등 3명의 주동자를 체포하자 안낙순을 위시
한 시위 군중들은 석방을 요구하며 기세를 높이자, 이에 기가 꺾인 오오키는 체포한 사람들을
석방하였다.
석방에도 불구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의 수는 더욱 늘어 이성구(李成九), 이규선(李圭
璇), 김경도(金敬道), 정규환(鄭奎煥), 김용준(金用俊), 유진홍 등이 다시 500여명의 군중과 함
께 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장 유진열에게 “만세 시위에 참여하지 않으니 죽여라.” 하며 투석전을
하였다. 이후 오산우편소를 파괴하고, 일본인 거주지로 몰려가 파괴하며 기세를 올렸다.
이에 군중은 더욱 늘어 7~800명에 이르고, 오산역을 파괴한다며 이동하자, 일본 경찰과 보
병이 합세하여 발포하자 무기에 대항할 수 없어 해산하게 되었다.
오산지역의 3·1운동은 식민지배기구였던 면사무소, 경찰주재소 앞에서 실력행사를 보여준
것으로서 당연한 우리의 주권을 공표한 것이다. 오산지역에서 야금야금 거주지를 확장하는 일
본인들의 지배력을 부인한다는 실력행사였다.
오산3·1독립만세운동의 주모자로 몰려 체포된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한 농
민들이며 거의 대부분이 성호면(오산)에 살던 주민들이었다. 이들의 만세운동에 대해 일제는 징
역 6월에서 1년 8월까지 형을 선고 했다. 이성구(수원군 일형면, 25세, 징역 1년 8월), 김경도
(성호면 오산리, 34세, 징역 1년 6월), 공칠보(본명 공석윤, 성호면 궐리, 36세, 태 90), 이규선
(진위군 북면, 25세, 징역 1년 8월), 정규환(성호면 오산리, 25세, 징역 1년), 유진홍(성호면 세
교리, 34세,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 안낙순(성호면 세교리, 44세, 징역 6월), 김용준(성호면
금암리, 38세, 징역 6월). 이 분들의 직업은 모두 농업이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오산의 3·1독립만세운동은 처음에는 학생과 천도교도들의 시작으로 시
268 남경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