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34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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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김씨에 의한 국정농단으로 관직을 돈으로 사고 파는 매관매직이 성행해 수령들이 과도

               하게 세금을 징수했다. 지금 있는 자리를 얻는데 쓴 비용을 충당해야했고 현직을 계속 유지하거
               나 더 좋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 더 많은 돈을 거둬들여야 했다. 이렇다보니 당시 조선경제의 근
               간인 농민들의 삶이 파국을 맞을 수 밖에 없었다. 권력이 있거나 돈 있는 사람들은 각종 편법과

               탈법으로 세금을 피해갔고, 힘없고 돈없는 농민들만 과도한 세금에 땅도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해 갔다. 지금으로 치면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었고 중산층이 몰락해 갔다는 얘기다.



                  변화는 기본적으로 조선후기 이래 농사기술의 발달에 따른 생산량의 증가와 상업 및 수공업의 발달
                  에 기인한 것이다. 농촌에서는 양반지주층이나 부농들이 농지를 대량으로 확보하여 부를 축적해간
                  반면, 가난한 농민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적은 농지를 팔고 소작농민이나 품삯 노동자로 전락해가
                  고 있었다. 이러한 경제 환경의 변화와 여러 요인들에 의한 신분질서의 문란으로 종래 양반중심의
                  사회체제가 서서히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많은 농민층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허울 좋은 양반 신분
                  을 칭하기도 하였고, 반대로 기존의 양반 후예들이 경제기반을 잃고 농민들과 다름없는 가난한 처지

                  로 떨어지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엄격한 신분질서가 점차 붕괴되어갔고, 농민들의 의식이 성장하
                  여 사회변화의 주도계층으로 성장하였다.         33)


                조선후기 농업생산력 증가와 상업 및 수공업의 발달로 경제력이 상승했다. 그렇게 축적된 사

               회적 부가 골고루 나뉘지지 않고 특권층으로 흘러들어 민중들의 삶과는 괴리되고 말았다. 그래
               서 농민은 소작농이나 품팔이하는 사람으로 전락했다. 또한 돈 있으면 양반이 되고 돈이 없으면
               양반이라도 농민과 다름없는 처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조선 500년을 지탱한 세습

               신분제 질서가 무너져가는 길로 들어섰다는 반증이었다.
                이런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이유로 19세는 민란의 시대가 되었다. 죽창과 곡갱이를 들고

               정부군과 맞서는 농민들은 가난과 차별에 정면으로 맞서 싸웠다. 관아에 부당하고 차별적이며
               과도하게 매겨진 세금을 원칙대로 시정해 달라고 진정을 넣고 이것이 않되면 한양까지 올라가
               임금에게 실상을 고발했으나 고쳐지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오랜 시간만 허비하고 좌절할 수 밖

               에 없었다. 이것이 쌓이고 쌓여 농민들이 무기를 손에 들고 정부에 대항할 수밖에 없었다. 처절
               한 생존을 위한 투쟁이 민란이 되었다.








               33) 고성훈 외 앞의 책 179-180쪽



               232  한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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