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01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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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宗)에 대하여 배웠다. 11년의 공부 끝에 징허대사의 심인(心印)을 얻어 신라로 돌아오자 광종
대사 무염이 원랑을 공경하여 맞았다.
54)
원랑이 참선하였던 직산의 寓▧▧▧▧은 어디일까? 동여비고 남양지방도 에 따르면 그 위치
는 두 곳으로 좁혀진다. 고려시대에 창건된 청명산홍법사는 제외되고 신라시대에 창건된 비봉
산봉림사(飛鳳山鳳林寺)와 창건 시대를 알 수 없는 절명산장생사(絶命山長生寺)로 압축된다.
그런데 비봉산봉림사(飛鳳山鳳林寺)는 당항성의 치소인 당성에서 멀다. 또 바닷가 포구에서
도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원랑이 머문 곳은 절명산장생사에 집중된다. 그러나
현재 절명산장생사의 위치는 오리무중이다. 절명산의 위치도 장생사의 흔적도 찾을 길이 없다.
남양지방도에 근거하여 청명산의 서봉인 지네산를 절명산으로 추정하는 정도이다.
절명산장생사가 세워진 시기와 사라진 시기도 알 수 없다. 그러나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사
찰이었을 가능성은 있다. 신라 진평왕 대에 세워진 사찰 비봉산봉림사(飛鳳山鳳林寺)와 고려시
대에 세워진 청명산홍법사(淸明山弘法寺)가 아직도 건재하기 때문이다.
동여비고 남양지방도에 따르면 절명산은 청명산 서쪽 봉우리인 지네산이다.그 위치는 현재의
안곡서원이나 청명산법흥사의 자리가 분명하다. 절명산(絶命山)과 지네산이 절지(節肢)의 의미
로 소통하기 때문이다. 절지동물(節肢動物)인 지네는 마디가 끊어지면 절명(絶命)하기 때문이
다.
남양지방도에 기록된 절명산장생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까닭은 무엇일까? 필자는 그 이유
를 두 가지로 본다. 그 하나는 조선시대 억불숭유의 정치적 이념과 사상의 결과로 본다. 조선 유
생들의 불교 지우기의 소행으로 본다. 그런 사정으로 장생사는 사라지고 그 주변에 안곡서원이
섰을 것으로 판단한다.
그 둘은 왜군의 파괴로 본다. 경주 분황사에 있었던 화쟁국사비도 임진왜란 때에 파괴되었다.
필자는 이 지점에서 절명산장생사지를 안곡서원 터에 비정한다. 안곡서원 터를 장생사지(長
生寺址)로 보는 근거는 다음 여섯 가지이다.
하나, 남양지방도의 절명산을 현재의 청명산으로 본다. 청명산 서봉의 이름이 절명산과 통하
는 지네산이기 때문이다.
둘, 조선시대의 정치이념은 불교를 지우고 유교에 바탕을 두었다. 일예로 우암 송시열이 출가
한 딸에게 써준 戒女書에는 ‘절에 가서 시주 불공하는 것은 더욱 허무하니 마음도 먹지 마라’고
썼다.
54) 남양지방도, 동여비고, 1682년, 양산 대성암 소장.
원효가 成道한 당주계 樴山의 토굴무덤 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