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97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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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물을 막을 때에 무진장의 어려움이 있었다. 둑을 쌓으면 무너지고 또 쌓으면 또 무너졌
다. 밀물과 썰물의 파도가 휩쓸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총동원되어 바닷
물을 거의 다 막아갈 때였다. 그때에 허튼 중(僧) 하나가 제방을 황급히 지나갔다. 찰나에 가래
질을 하던 사람들이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랫밥을 떠서 그대로 던졌다. 가랫밥을 맞은 중
이 쓰러져 제방에 묻혔다. 비로소 제방이 완성되어 바닷물을 막을 수 있었다.”
이 이야기에는 허튼 중(僧)이 등장한다. ‘가짜 중’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 마을에 자
생하는 가죽나무를 바닥에 묻어 만든 보(洑) 피(陂)라는 것이다. 갯벌에 가죽나무를 쌓아 막은
제방이 구전되면서 가짜 중으로 변형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는 대구의 칠곡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면서 발굴된 신라시대의 수중보(水中洑)
에 있다. 수중보에 쓰인 나무가 바로 가죽나무(가짜 중나무)였던 것이다. 가죽나무는 곧고 크게
자라며 비바람에도 썩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지금도 경상도에서는 가죽나무를 가죽나무와 개가죽나무로 구분하여 부른다. 가죽나무는 ‘가
짜 중나무’라는 의미이다.
과거 입피골의 방죽들에는 두꺼운 판자로 만든 수문을 설치하였다. 바닷물을 막고 시냇물은
내보내는 한 방향 열림 구조의 수문으로 벼농사를 지었다. 현재는 시멘트로 만든 철제 수문으로
바닷물과 시냇물을 막아 벼농사를 짓는 들판이다. 바닷물의 역류를 막는 수문은 입피골의 좌우
에 2중으로 설치하였다.
c. 입피골은 가죽골
입피골을 ‘立皮谷’으로 해석한다면 이곳은 ‘가죽 皮’의 가죽골이다. ‘가죽골’, ‘가죽나무골’, ‘가
죽나무 세운 골’로 이해한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에 자라는 가죽나무와 가중나무는 중국이 원산이다. 최초 중국에서 들여왔을 때는
똑같은 이름으로 불렸다. 가죽나무와 가중나무의 잎의 모양이 똑같아 구별하기 어렵다. 그래서
꽃이나 열매로 두 나무를 구별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화성시는 다른 지역과 다른 특징이 하나
52)
있다. 그것은 이 지역이 가죽나무(참죽나무) 의 최대 생산지라는 점이다. 가죽나무(참죽나무)
는 문양이 아름답고 목질이 피처럼 붉다. 또 곧고 크게 자라며 잘 썩지 않아 집을 짓는 기둥이나
보(洑)를 막는 재목으로 많이 쓰였다.
52) 참죽나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원효가 成道한 당주계 樴山의 토굴무덤 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