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98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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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고향집 울타리에도 예닐곱 그루의 가죽나무가 있었다. 그 중에 한 그루는 전봇대보다
크고 굵었다. 할머니가 신주단지를 놓아두고 받들던 신목이었다.
필자가 먼 길을 찾아가 살펴 본 것은 전주시 경기전(慶基殿)에 보전하는 가죽나무다. 또 삼척
시 쉰움산 천은사에 자라는 세 그루의 가죽나무다. 또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봉남리의 350년 된
노거수이다. 그리고 화성시 마도면의 농가 주택에 현존하는 가죽나무 울타리였다. 블루베리 농
사를 짓는 백곡리의 양 씨와 한우 목장을 운영하는 홍 씨 댁이다.
필자는 입피골의 우리말 이름을 ‘가죽골’로도 해석한다. 입피골(立皮谷)에 딸린 갯벌 포구의
이름이 가죽포(佳竹浦)이기 때문이다. 입피골과 가죽포(佳竹浦)는 피와 가죽으로 상통한다. 더
자세히는 ‘가죽나무 선 골’이다.
d. 입피골은 홍문골
입피골을 ‘立血谷’로 해석한다면 이곳은 ‘홍문(紅門,紅箭門)’이 위치한 곳이다. 홍문은 능(陵),
원(園), 묘(廟), 궁전(宮殿), 관아(官衙) 등의 정면 앞에 세우던 붉은 물감을 칠한 나무문이다.
소가죽이든 토끼가죽이든 짐승 가죽의 내피(內皮)는 핏물로 붉다. 그리고 사찰 앞의 일주문이
나 서원 앞의 홍살문의 기둥도 붉다. 그러므로 마도면 백곡리의 입피골(立血谷)에 홍살문의 의
미가 엿보인다. 입피골에 가죽나무로 만든 일주문(홍살문)을 세웠을 개연성이 엿보인다.
사찰 앞에 세우는 일주문과 서원 앞에 세우는 홍살문의 역할과 형태는 큰 차이가 없다. 이곳
은 성역이니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는 표지의 역할이고 잡신을 경계하는 붉은 물감을 덧칠한 나
무기둥의 형태이다. 설명을 덧붙이면 가죽나무의 ‘가죽 피(血)’에 입피골(立血谷)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입피골에 세웠을 것으로 추정되는 일주문은 가죽나무(참죽나무)로 본다. 이 마을에 자라는 곧
고 우뚝한 가죽나무를 베어 세웠을 것이다. 거죽을 벗기면 붉은 속살이 나타나므로 굳이 붉은
안료를 섞어 단청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입피골에 위치한 현재의 고모교회가 그 의
미를 간직하여 이채롭다.
고모교회가 입피골에 세워진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35년이다. 어언 80여년의 역사를 가진다.
그 위치는 화성시 마도면 고모리 177이다.
1960년에 고모교회에 종탑을 세우게 되었다. 교회의 동종을 높이 매달아 놓을 종탑이었다.
이때 고모교회의 신도 양(梁) 씨가 묘안을 냈다. 그것은 자기 집 울타리에 자라는 가죽나무(참죽
나무)를 베어 종탑을 세우는 것이었다. 양 씨는 전봇대보다 키가 크고 굵은 가죽나무 두 그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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