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02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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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절명산장생사는 당성과 왕모대, 당성과 영생포를 잇는 길가에 위치한다. 당항성의 치소
당성에서 포구로 나가는 중간의 갈림길에 위치한다.
넷, 장생사(長生寺)의 長生은 영생이골(永生之谷)의 永生과 의미가 같다. 이 지역에 위치한 영
종포(永宗浦)는 ‘긴 산마루테기’이고, 영생포(永生浦)는 ‘긴 산날맹이’에 소통하기 때문이다.
다섯, 안곡서원 터에는 사철 마르지 않는 큰 샘이 있다. 상수도가 공급되지 이전, 서신면의 면
민들은 안곡서원의 샘물을 길어다 먹었다. 면민들의 식수를 충당할 만큼 수량이 풍부하였다는
것이다. 바닷가에 면한 지역에 꼭 필요한 것은 맑고 짜지 않은 샘물이었다.
여섯, 유교가 정치이념이었던 조선시대에도 안곡서원은 두 차례나 죽었다 살아났다. 1729년
(영조 5), 안곡서원의 사액이 취소되었다. 1740년(영조 16), 회복되어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선현의 위패는 부근의 갯벌에
매안(埋安)하였다. 그 후 1976년에 남양향교의 지방 유림과 문중의 협력으로 복원하였다.
철폐령이 내린 안곡서원의 위패들을 갯벌에 매안(埋安)한 것처럼 장생사의 흔적도 안골에 매
안하였던 것이다. 안곡서원과 절명산장생사의 이름에 안골(安谷)과 매안(埋安)이 의미가 담겨있
는 것이다.
먼 바다를 항해하는 사신이나 무역상, 유학생이나 유학승이 두려워하는 것은 파도에 휩쓸려
죽는 것이다. 그러므로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절명산장생사가 청명산(지네
산) 자락의 안골에 존속하였던 것으로 본다.
지도상의 절명산장생사는 입당 유학승이 큰 배를 기다리며 머물기에 적합한 장소이다.
월광사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문의 결자 ‘寓▨▨▨▨’를 寓居長生寺로 판단한다. 원랑이 석 달
동안 머물러 수도한 장소로 본다. 컴퓨터 영상 등의 판독기법(判讀技法)으로 비문을 확인하면
그 사실 여부는 금세 판가름이 날 것이다.
절명산장생사지를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안골에 비정한다. 안곡서원(安谷書院) 좌측 능선의
비 가림 포도과수원 자리이다.
200 임종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