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2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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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들의 고통을 덜 수 있는 것이었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주려는가? 나는 하늘 떠받치는 기둥을 깎으려네(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이 노래를 들은 무열왕은 홀로 된 요석공주를 원효의 배필로 맺어 사위로 삼았다. 그리하여

               원효의 위상을 한껏 높여 주었던 것이다. 홀로 된 과부를 배려하는 무열왕 김춘추와 신승 원효
               의 생각이 같았다는 것이다.

                원효의 입장에서 보면 신라 왕족과 입당유학파가 누리는 불교는 사치였을 것이다. 석가모니
               의 일족을 주창한 선덕여왕과 자장율사의 진종설(眞宗說)은 가짜였을 것이다. 신라 고승 혜공
               (惠空)과 원효(元曉)가 내기한 포항 운제산 오어사(吾魚寺) 설화는 그 일례일 것이다.

                ‘혜공과 원효는 오어사의 계곡에서 물고기를 잡아먹고 방변(放便)하였다. 그랬더니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고 한 마리는 죽어서 아래로 떠내려갔다. 두 사람은 올라가는

               물고기를 보고 서로 자기 물고기라고 주장하였다’는 설화이다.
                원효는 당주계 직산의 토굴무덤에서 성도한 후 입당유학을 접었다. 신라 왕실이 후원하는 유
               학을 포기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래서 龕墓不二라는 오도성을 불

               렀던 것으로 판단한다.







               Ⅴ. 원효가 성도한 당주계 직산의 토굴무덤





               A. 남양만의 주요 섬과 포구



                〈월광사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는 870년에 세워졌다. 987년에 편찬된 《송고승전》 보다 무려
               97년 전에 세워졌다.

                이 비는 신라 헌강왕의 명으로 금성군 태수 김영(金潁)이 비문을 짓고 오등산 보리암사의 순
               몽(淳蒙)이 글씨를 썼다. 그러므로 원효에 대한 가장 신빙성이 있는 최고의 자료이다.

                입당유학의 길에 올랐던 원효가 성도한 토굴무덤은 어디인가? 감실과 무덤이 둘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고 유학을 접은 본국 해문 당주계 직산(樴山)의  寓▨▨▨▨는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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