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7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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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매어두던 소나무였다. 그래서 ‘쌍송리’라는 지명도 이 지역에 남았다.

                 가죽포와 금당리에 살아남은 몇몇 소나무는 그 옛날의 영화를 떠올린다. 이 지역에 울창했던
                소나무는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경복궁 재건에 수없이 베어졌다. 수 백 그루의 아름드리 소나
                무가 베어져 이곳 가죽포에서 도성 한성의 마포(麻浦)로 실려 갔다.












































                                   도-5. 가죽포의 소나무


















                                                               원효가 成道한 당주계 樴山의 토굴무덤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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