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8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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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금당리(錦堂里)와 보초골, 회룡골(回龍谷)과 송대(送臺)



                화성시 마도면 금당리는 ‘錦堂里’와 ‘金溏里’로 표기한다. 금불상(金佛像)이 위치하는 금당(金
               堂)이 아니라 비단옷(錦衣)을 의미하는 금당(錦堂)과 사금(砂金)을 의미하는 금당(金溏)이다. 마

               을 주민들이 전하는 금당리의 유래는 크게 세 가지이다. 다음은 금당리 이장을 지낸 홍 씨와 황
               씨의 구술이다.

                “옛날 비단옷을 입은 사신이 배에서 내려 마을에 들어 왔다. 마을 사람들이 진흙길에 마포(麻
               布)를 깔아 사신이 지나가는 것을 도왔다. 그래서 이 지역의 이름이 마도면(麻道面)이 되었고 마
               을 이름이 금당리(錦堂里)이 되었다.”

                “옛날 고을 원님이 이 마을에 왔다. 원님은 소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선 마을의 아름다운 경치
               를 보고 마을의 이름을 물었다. 마을 주민들이 사금이 많이 나는 금당(金溏)이라고 말하자, 소
               나무가 아름다운 금당(錦堂)으로 바꾸어 부를 것을 이르셨다.”

                “금당(金溏)은 옛날의 이름이다. 마을 앞 모래지(사곶리)의 진창에서 사금이 많이 났으므로 금
               당이라는 지명이 되었다.”
                금당(金溏)은 조선시대의 지명이다. 금당리 마을 뒷산에 세운 정승 묘비에 금당(金溏)이라는

               지명이 새겨져 있으므로 사실로 인정된다.
                금당(錦堂)은 현재의 지명이다. 금당리에 아름다운 소나무가 많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경복

               궁 재건 때에 수백 개의 아름드리 소나무를 베어 가죽포에서 한성의 마포로 실어 날랐다.
                비단옷(錦衣)을 입은 사신이 마포를 깐 길을 지났으므로 금당(錦堂)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증
               명할 길은 없다. 지명 마도면의 금당리와 보초골, 회룡골과 송대 등에 구전하는 이야기로 추정

               하는 것이다.
                금당골과 붙어 있는 보초골의 지명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 없었다. 마도면 해문리에 위치한 회

               룡골과 송대의 유래에 대해서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그냥 보초골과 회룡골, 송대로
               알고 지냈다는 대답뿐이었다. 마도면 청명산 자락에 일백 개의 골짜기가 있으므로 그럴 수도 있
               을 것이다. 그러나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수차례에 걸친 답사로 그 의미를 추정하였다.

               비단옷을 입은 사신이 마도를 지났다는 금당리의 전설에서 그 유래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하나, 마도면 금당리를 나·당연합군을 결성하고 돌아온 사신(왕) 김춘추(무열왕)의 발자취로
               본다. 그 근거는 금당골과 보초골과 회룡골과 송대에 있다. 금당골과 보초골은 왕모대와 가죽포

               에서 남양읍으로 이어지는 마도(麻道)에 위치한다. 회룡골과 송대는 금당리에서 해문리로 이어
               지는 마도(麻道)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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