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8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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謂是囊中一物耳(위시낭중일물이)
                  那知玄花落白羽(나지현화락백우)

                  (고구려)를 취하는 것은 주머니 속 물건처럼 쉽다고 들리더니
                  玄花(눈)에 흰 깃 화살이 꽂혀 떨어 질줄 그 누가 알았으랴?


                당 태종 이세민이 고구려에 패하여 퇴각한 것은 눈(玄花)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병이
               나서 수은이 든 탕제를 먹고 50세에 죽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사실은 구당서기나 신당

               서기에서 찾아볼 수 없다. 물론 나·당연합군을 결성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도 전혀 없다. 역사
               는 승자의 입장에서 기록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은수포 마을에서 포도 농사를 짓는 토박이 홍 씨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붉은 돛을 단 배가 이 아래 은수포에 들어오면 새우젓을 사러 달려가곤 했어요. 원효대사가
               배를 타고 가다가 마산포에서 내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덤에서 해골물을 마시고 도를 깨달았

               다고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원효가 당에 가는 배에 올랐다가 마산포에서 내렸다는 것이다. 원효가 배에 올랐다가 마산포

               에서 내렸다면 그 까닭은 무엇일까? 당에 가는 상선의 선장으로부터 무열왕이 죽었다는 부음을
               전해들은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유학을 포기했고 배에서 내려 토굴무덤에 들어가 고골관을 수
               행한 것은 아닐까?

                물론 홍 노인의 말을 곧이 곧 대로 믿을 수는 없다. 그러나 원효는 무열왕 김춘추의 사위이다.
               요석공주를 맞아 아들 설총을 낳고 파계승을 자처하였다. 왕족도 아닌 원효가 당나라 유학에 나
               설 수 있었던 것은 장인 무열왕 김춘추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장인 무열왕이 전사하였다는 부음을 받고 유학을 떠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유학을 포
               기하고 도성 금성으로 돌아가 무열왕의 영면을 기도하였을 것이다. 무열왕릉의 남쪽에 위치하
               였던 선도산 영경사(永敬寺)는 원효가 무열왕의 명복을 빌었던 원찰이었을 것이다.



               2. 고골관(枯骨觀)의 수행



                                26)
                자장율사(慈裝律師) 는 고골관(枯骨觀)을 수행한 승려로 유명하다. 시신이 썩어서 백골로 변
               하는 모습을 관(觀)하는 백골관(白骨觀)이다.





               26) 자장율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66  임종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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