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0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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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열왕 김춘추가 죽자, 피가 피를 부르는 전쟁은 또다시 불붙기 시작하였다. 이제까지의 전쟁

               은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鳥足之血이요 九牛一毛에 지나지 않았다. 토굴 무덤에서 고골관을 수
               행하던 원효는 이렇게 절규하였을 것이다.


                  나·당연합군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려는 김춘추와 김유신의 작심은 허업(虛業)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쟁터에 내몰리는 병사의 죽음은 아직도 끝이 없고 전쟁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고통은 더욱
                  가중되었다. 이런 기막힌 현실을 두고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 또한 나 자신의 부귀와 명예를
                  위해 당에 가려는 것이 아니었던가? 아아, 부끄럽구나! 천방지축으로 무애행(無礙行)을 떠들었던 나
                  의 행동이 참으로 부끄럽구나! 한반도에 내리는 핏빛 苦雨는 언제나 그친다는 말인가? 아아, 하늘이
                  여! 석가여래여! 이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이후, 원효는 저술과 포교에 전념하는 것으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혈사(穴寺)에 들어가 조용
               히 수도하다 고요히 입적하였다. 원효가 입적한 혈사는 경주의 골굴사로 파악된다. 젊은 시절
               원효가 범어로 된 불경을 공부하던 장소였다. 구랍 70세였다.


               3. 범자(梵字) 불경에 통달



                원효가 제2차 입당 유학에 도전한 것은 45세였다. 당나라에 유학하기에는 이미 늦은 나이였
               다. 불경 공부에 매진하던 때가 아니라 한반도의 각지를 찾아다니며 대중 불교의 포교에 정진하

               던 때였다. 《송고승전》 〈의상전〉은 元曉의 행장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왕이 백좌인왕경 대회를 설치하고 두루 덕이 높은 승려들을 찾았다. 마을 사람들이 명망이 높은 원

                  효를 천거하였으나, 여러 승려들이 그를 미워하여 왕에게 나쁘게 말하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의 소(불경의 주석)를 강론하는 날 왕과 신하, 승려 등 많은 사람이 법당으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원효가 큰 소리로 “옛날 서까래 백 개를 구할 때는 비록 참가하지 못하였으나,
                  오늘 대들보를 눕히는 데는 나 혼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하니 여러 승려들이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
                  워하였다.


                황실 사찰인 황룡사 백고좌법회에서 원효는 이미 생불이었다. 왕과 왕족, 고승 100명을 앉혀

               놓고 강론한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다.
                당나라 유학에 앞서 원효는 이미 최고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입당 유학파의 어느 승려보다





               168  임종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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