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6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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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료는 무열왕 김춘추가 사망하기 한 달 전의 기록이다. 신라군이 빈골양 전투에서 백제
부흥군에게 대패한지 불과 18일만의 일이었다. 고구려, 말갈군이 백제 부흥군을 도와 신라를 협
공하였다는 기록이다.
신라 한주(신주)에는 두 개의 군부대가 있었다. 이천에 두었던 남천정(南川停)과 여주에 두었
던 골내근정(骨內斤停)이다.
고구려장군 뇌음신과 말갈장군 생해가 공격한 신라의 술천성은 여주의 파사산성(婆娑山城)에
비정된다. 파사산성은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천서리 산9의 남한강변에 위치한다. 여주시에 삼
국시대의 산성 파사산성이 유일하므로 파사산성이 곧 골내근정(骨內斤停)이었을 것이다.
660년 6월, 백제 정벌에 나선 무열왕 김춘추와 대장군 김유신, 태자 김법민은 한주의 남천정
(南川停)에 머물렀다. 이때 무열왕은 태자 김법민으로 하여금 100척의 군선을 이끌고 덕물도에
나가 대총관 소정방을 맞이하게 하였다. 당장 소정방을 만나 백제 정벌의 계획을 숙의하게 하였
다.
태자 김법민이 덕물도로 출발한 곳은 술천성(여주시)의 골내근정(骨內斤停)이었던 것이다. 설
명을 덧붙이면 골내근정이 곧 지금의 파사산성이고, 파사산성 아래의 이포나루(상자포와 하자
포)에서 신라 수군이 출발하였던 것이다. 그 길은 여주의 이포나루-한성의 송파나루-강화도의
혈구진-인천의 영종도-인천의 덕물도로 출정하였다는 것이다.
빈골양 전투의 패배에 이은 고구려와 말갈군의 협공에 무열왕 김춘추는 크게 당황하였을 것
이다. 여주의 파사산성은 견고하여 고구려장군 뇌음신과 말갈장군 생해가 물러갔다. 그렇지만
북한산성을 공격하는 뇌음신과 생해를 물리칠 방도가 없었다. 북한산성을 지키는 城主 동타천
(冬陀川)을 도울 뾰족한 방도가 없었다. 북한산성 전투에 신라군을 투입한다면 백제 부흥군은
신라 왕성을 공격하여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열왕 김춘추는 북한산성 구원을 포기하였
다.
그런데 성주 동타천은 노약자와 아이들도 격려하여 북한산성을 어렵사리 지켜냈다. 이에 무
열왕은 성주 동타천의 공로를 크게 포상하여 대나마(大奈麻)의 자리(位)에 올렸다. 대나마는 진
골과 5두품 이상이 받을 수 있던 관위였다. 무열왕이 10등급의 성주 동타천의 관위를 5두품이
나 올려주는 특별한 조치는 남한강 수로의 중요성 때문이었다.
빈골양 전투 패전 직후, 신라 무열왕은 경상북도 경산(慶山)에 두었던 압독주의 치소를 경상
남도 대야(大耶)로 옮겼다. 무열왕이 경산에 있던 압독주를 대야(합천)로 전진 배치한 것은 백제
금마군을 공취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었다. 그리고 한 달 후인 6월 ▨일, 신라 무열왕이 금마군
에서 갑자기 죽었다. 백제 부흥군의 토벌을 직접 독전하다가 금마군 전투에서 전사하였던 것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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