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4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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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부흥군을 토벌하는 금마 전투에서 전사한 것이 분명하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원효가 입당 유학을 포기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그 하나는 무
열왕 김춘추의 죽음, 그 둘은 고골관의 수행, 그 셋은 범어 불경에 통달, 그 넷은 왕족이 아닌
신분으로 정리한다.
1. 무열왕 김춘추의 죽음
원효가 유학을 포기한 것은 무열왕 김춘추의 죽음 때문이다. 무열왕 김춘추는 원효의 장인어
른이다. 원효와 의상이 당항성에 머물러 당에 가는 배편을 물색하고 있던 무렵이었다. 당에 들
어가는 거함(巨艦)을 물색코자 당주계의 여러 포구를 돌아다닐 때였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김춘추의 죽음은 자연사가 아니었다. 백제 부흥군과 벌인 금마전
23)
투에서 전사한 것이 분명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무열왕 김춘추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기
록한다. 661년 6월이었다.
6월에 大官寺의 우물물이 변하여 피가 되고 금마군(金馬郡:익산)의 땅에서 피가 흘러 너비가 5步나
되더니 왕이 돌아갔다. 시(諡:시호)를 무열(武烈)이라 하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하였다. 묘호
(廟號)를 올려 태종(太宗)이라 하였다. 당의 고종이 부음을 듣고 낙성문에서 애도식을 거행하였다.
위의 사료는 백제 부흥군과 신라군이 벌인 금마전투의 기록이다. 무열왕 김춘추가 금마군의
전장에서 전사하였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金馬는 무왕이 세운 미륵사와 대관사(왕궁사)가 있는 백제의 행궁이었다. 해로로 왜에 원군을
요청할 수 있는 백제의 또 다른 행궁이었다. 금마가 고향인 무왕은 한때 금마를 백제의 왕성으
로 삼았었다.
大官寺는 백제 금마 왕궁에 세운 사찰의 이름이다. 백제 무왕 때 창건된 사찰로 ‘관궁사(官宮
寺)’, ‘궁사(宮寺)’, ‘관사(官寺)’라는 명문 기와가 출토되었다.
24)
삼국사기는 빈골양(賓骨壤,고부) 전투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23) 무열왕, 삼국사기(상), 김부식지음 이병도역주, 을유문화사, p.134.
24) 빈골양(賓骨壤,고부), 상게서, p.133.
162 임종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