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9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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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남한강 수로를 이용한 조운
삼국시대에도 남한강 수로를 이용한 조운은 매우 활발하였을 것이다. 고구려가 충청북도 충
주를 국원성으로 삼았고, 신라가 고구려의 국원성을 빼앗아 중원경으로 삼은 것이 그 확실한 증
거이다.
고려시대 이래 원주 흥원창(興元倉,興原倉)은 계속 명맥을 유지하였다. 또한 충주 앙암(仰巖),
여흥 우음안포(亐音安浦)와 추호포(推乎浦), 천녕 이포(利浦) 등 소규모 조창들이 운영되었다.
조선 태종 때에 남한강 수로는 더욱 활성화 되었다. 남해안의 통양창, 마산창, 불암창 등이 왜
구의 잦은 습격으로 폐지되면서였다. 경상도에서 거둔 세곡의 수납을 계립령 너머의 충주로 운
반하면서 남한강에 경원창(慶源倉)이 설치된 것이다.
이를 대변하는 지명은 월악산로에 위치한 지릅재와 닷돈재이다. 지릅재는 육로로 충주에 가
는 지름길이고, 닷돈재는 수로로 충주에 가는 지름길이었다. 계립령을 넘는 세곡을 날라주면 닷
돈을 운반비로 받았기에 닷돈재가 되었다.
H. 〈월광사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의 이송 방법
1922년, 〈월광사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남한강
水路에 딸린 한수면의 황강나루에서 경성(한성)으로 이송되었다. 그 기록은 국립중앙박물관 조
21)
선총독부 박물관 문서 월광사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 이송 복명서 에서 확인된다.
敷設 卜口 使用 黃江里 京城 百三十餘里 水路 據
22)
위 복명서에 등장하는 黃江里는 제천시 한수면의 황강나루 이다. 〈월광사원랑선사대보선광
탑비〉가 水路로 이송되었다는 기록에서 남한강 뱃길이 그대로 밝혀진다.
21) 월광사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 이송 복명서, 조선총독부자료, 국립중앙박물관.
22) 황강나루, 겸재 정선의 「남한강 실경 산수도」 중 「黃江書院」.
원효가 成道한 당주계 樴山의 토굴무덤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