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8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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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경덕왕 때 내제군(奈堤郡,제천군)에 딸린 영현은 둘이었다. 적성현과 청풍현이었다. 그
중심은 현재의 금수산과 남한강이었다. 금수산 동쪽은 적성현이었고 금수산 서쪽은 청풍현이었
다. 적성현과 청풍현은 금수산의 산길과 남한강의 물길로 소통된다. 내제군의 두 현을 관할하던
통일신라 후기의 관직이 금성군 태수였을 것이다.
19)
여기서 필자는 원랑(圓朗) 과 김영(金潁)의 관계에 주목한다. 입당 유학승 원랑은 816(헌덕왕
20)
8)∼883(헌강왕 9) 연간의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이다. 입당 유학생 김영(金潁) 은 생몰년 미상
이나 통일신라 후기의 학자로 원랑 보다 한세대 아랫사람이다.
866년, 원랑이 11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신라로 돌아왔다. 신라 헌강왕의 부름을 받아 국정에
참여 하였다. 신라 정부에서 선발한 김영과 최치원 등이 당나라 유학에 오르기 2년 전의 일이
다. 그러므로 김영과 최치원 등은 원랑 선사로부터 당나라 유학에 필요한 오리엔테이션을 받았
을 것이다. 십 년 공부를 위한 사전 준비와 뱃길 등의 제반 사항을 소상히 들었을 것이다.
897년, 창부시랑(倉部侍郞) 김영(金潁)이 신라의 하정사로 당나라에 갔다. 입당유학파인 김영
은 당의 여러 관리들을 익히 알고 지낸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신라의 하정사로 뽑힌 것으로 판
단된다.
김영이 당나라에 유학을 간 것은 언제쯤일까? 스무 살 즈음에 유학을 떠나 서른 살에 돌아와
관직에 올랐다고 보면, 그가 하정사로 간 것은 마흔 살 쯤으로 보여 진다. 사신 김영이 최언위
(868년생, 최치원의 종제)를 데리고 당나라에 들어간 것을 보면 그렇다. 이를 미루어 보면 김영
과 최치원 등은 신라 조정이 특별히 선발하여 당나라에 유학을 보낸 국자(國子)였다.
원랑이 월암산월광사 주지로 만년을 보낸 것도 이 일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인다. 국가의 시책
으로 어린 학생들을 당에 보내 놓은 선사는 그들의 학문 성취와 성공 귀환을 손꼽아 기다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한강 뱃길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월악산에서 만년을 보냈다는 것이다. 동문의
후배를 아끼고 사랑하는 원랑 선사의 마음이 월암산월광사에 머물게 하였던 것이다.
후배와 제자를 유달리 사랑하였을 원랑 선사의 마음이 충주호에 뜨는 둥근 달처럼 맑고 교교
하다.
19) 원랑(圓朗),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 김영(金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56 임종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