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7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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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를 창건한 이래 팔공산 미리사(美里寺),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와 보

                원사(普願寺), 계룡산 갑사(甲寺), 계람산 화산사(華山寺),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비슬산 옥천
                사(玉泉寺), 모악산 국신사(國神寺), 부악산 청담사(淸潭寺)이다.
                 그 외 의상이 개창한 근거가 뚜렷한 사찰이 더 있다. 영주의 소백산초암사, 안동의 학가산광

                흥사, 의성의 등운산고운사, 제천의 금수산무암사, 금수산정방사, 금수산옥천사 등이다.
                 의상이 개창한 봉황산부석사, 소백산초암사, 학가산광흥사, 등운산고운사, 금수산무암사, 금

                수산정방사, 금수산옥천사 등은 모두 소백산맥 죽령 인근의 낙동강과 남한강 주변에 위치한다.
                의상이 당항성에서 죽령을 넘어 신라의 왕성에 이르는 당항진로를 따랐다는 근거가 된다.



                3. 원랑(圓朗)이 수도한 사찰


                 원랑은 원효보다 201년 늦게 출생한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이다. 신승 원효를 흠모하여 원효

                가 성도한 당주계 직산(樴山)의 토감(土龕)을 찾아왔다. 직산의 寓▨▨▨▨에서 석 달간 수도하
                고, 성주산문의 광종대사를 찾아가 그의 문하에 든 늦깎이 승려이다. 광종대사의 추천과 후원으
                로 입당 유학한 그의 발길은 곧 원효와 의상의 발길이다.

                 원랑이 주지로 머무른 사찰은 월암산월광사이다. 현재의 이름은 월악산월광사지이다. 원랑이
                월암산월광사에서 머물며 포교한 것에서 당항진로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그것은 원효

                와 원랑이 월악산과 인연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원효는 월악산신륵사를 중창하였고, 원랑은
                월악산월광사의 주지로 머물다 입적하였기 때문이다.
                 월악산월광사는 남한강 월악나루에서 불과 5km의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다. 월악산 영봉과

                중봉과 하봉에 오르면 월악나루가 발 아래로 내려다보인다. 신라로 돌아온 원랑이 남한강 수
                로와 계립령을 이용하였다는 근거이다. 그 길은 제천시 한수면의 황강나루-월악나루-덕주산

                성-(계립령)-문경시 영순면의 삼강나루-상주-구미-칠곡-경주이다. 원랑이 남한강 수로와
                계립령, 낙동강 수로를 거쳐 신라의 왕성으로 돌아왔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는 월광사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문을 지은 김영(金潁)의 행적에서도 그대로 들어

                난다. ‘조청랑(朝請郞) 수금성군태수(守錦城郡太守) 사비어대(賜緋魚袋) 신(臣) 김영(金潁) 봉교
                찬(奉敎撰)’이라는 기록이다.
                 원랑 선사의 행장을 쓴 김영(金潁)은 금성군(錦城郡) 태수였다. 당(唐)에 유학하여 당나라의

                관직 ‘朝淸郞守定邊府司馬賜緋魚袋’를 받은 바 있다. 김영이 당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였을 만큼
                뛰어난 인물임을 의미한다.



                                                               원효가 成道한 당주계 樴山의 토굴무덤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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