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0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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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신라의 당항진로는 죽령 길과 계립령 길
신라의 왕성에서 경기도 화성시 남양반도의 당항성(당은군)에 이르는 길은 크게 네 갈래로 집
약된다.
하나, 백두대간 죽령(竹嶺) 길이다. 경북 영주에서 죽령을 넘어 충북 단양의 적성을 지나는 길
이다.
둘, 백두대간 계립령(鷄立嶺) 길이다. 경북 문경에서 계립령을 넘어 충북 충주의 대원사지와
제천의 덕주산성을 지나는 길이다.
셋, 백두대간 괘방령(掛榜嶺) 길이다. 경북 김천에서 괘방령을 넘어 충북 영동과 보은의 삼년
산성을 지나는 길이다.
넷, 한반도 연안해로의 길이다. 한반도의 남서해안을 따라 북상하거나 서해를 횡단하여 당에
이르는 길이다.
그런데 ‘괘방령 길’은 원효와 의상이 유학을 떠난 661년의 당항진로(党項津路)는 아니었다. 통
일신라 이후에 활성화된 당은포로(唐恩浦路)였다. 경북 김천과 충북 영동을 잇는 괘방령 길은
백제와 신라가 다투는 전장이었기 때문이다.
‘연안해로의 길’도 원효와 의상이 유학을 떠난 661년의 당항진로(党項津路)는 아니었다. 백제
부흥군과 고구려의 수군에 막힌 길이었다.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고도 웅주와 사비를 점령하
였지만, 신라는 백제 부흥군과 고구려군의 협공으로 큰 위협에 빠졌던 시기였다. 고구려의 기습
공격을 우려한 대총관 소정방이 당군을 철수하였기 때문이다.
661년 4월 19일, 신라군은 빈골양(賓骨壤,고부) 전투에서 백제 부흥군에 대패하였다.
661년 5월 9일, 고구려장군 뇌음신과 말갈장군 생해(生諧)는 신라의 술천성(述川城,여주)에
이어 북한산성(北漢山城)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장군 뇌음신과 말갈장군 생해가 신라의 술천성과 북한산성을 공격한 것은 남한강과
서해를 잇는 뱃길을 차단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원효와 의상이 따른 당항진로
는 죽령과 계립령을 넘는 길이었다.
입당유학에 나선 원효와 의상이 죽령을 넘었다면 육로와 수로의 두 가지의 길을 따랐을 것이
다. 육로의 길은 경북 영주-(죽령)-단양 적성-제천 와룡산성-충주 장미산성-장호원 설성산
성-이천 설봉산성-용인 할미산성-오산 독산성-화성 당성의 길이다. 수로의 길은 (죽령)-단
양 하진나루-청풍 황석나루-한수 황강나루-충주 목계나루-여주 오곡나루의 남한강 수로의
길이다.
158 임종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