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1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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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로와 수로를 동시에 이용하였다면 그 길은 단양 하진나루-청풍 황석나루-한수 황강나루-
충주 목계나루-여주 오곡나루-장호원 설성산성-이천 설봉산성-용인 할미산성-오산 독산
성-화성 당성의 길을 따랐을 것으로 판단한다.
입당유학에서 돌아온 원효와 의상이 계립령을 넘었다면 육로와 수로의 두 가지의 길을 따랐
을 것이다. 육로의 길은 화성 당성-오산 독산성-용인 할미산성-이천 설봉산성-장호원 설성산
성-충주 장미산성-한수 덕주산성-(계립령)-문경 고모산성-상주-선산(구미)-군위-영천-경
주의 길을 따랐을 것이다.
수로의 길은 여주 오곡나루-충주 목계나루-한수 황강나루-(계립령)-문경 삼강나루-상주
회상나루,강창나루,황포나루-선산 고아나루-구미 인동나루-칠곡 하포의 낙동강 수로를 따랐
을 것이다.
수로와 육로를 동시에 이용하였다면 그 길은 화성 당성-오산 독산성-용인 할미산성-이천
설봉산성-장호원 설성산성-충주 장미산성-충주 목계나루-한수 황강나루,월악나루-한수 덕
주산성-(계립령)-문경 고모산성-문경 삼강나루-상주 회상나루,강창나루,황포나루-선산 고
아나루-구미 인동나루-칠곡 하포-대구-경주의 길을 따랐을 것이다.
원효와 의상은 죽령과 계립령 길을 이용하여 신라의 왕성과 당항성을 오고 갔을 것으로 판단
한다.
Ⅳ. 무열왕의 죽음과 원효의 유학 포기
A. 조어도중(條於道中)과 고우(苦雨)의 의미
<월광사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는 원효가 ‘조어도중(條於道中)’에 ‘고우(苦雨)’를 피하여 토굴
무덤에 들었다가 성도(成道)하였다고 기록한다. ‘조어도중’과 ‘고우’의 의미를 자세히 들여다보
았다.
원효는 당주계에 이르러 창해를 건널 거함(巨艦)을 찾아다녔다. 당으로 건너갈 큰 배를 구하
러 다녔다. 그런데 당항성(党項城)에 딸린 포구는 한두 곳이 아니었다. 당항성의 골짜기마다 여
러 개의 포구가 열려 있었다. 그런 까닭에 지금도 화성시 송산면 구봉산 주변은 칠곡리(七谷里),
원효가 成道한 당주계 樴山의 토굴무덤 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