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3 - 오산학 연구 4집
P. 153

도-2. 해문, 구화역




                 조선시대 남양에는 두 곳에 역(馹,驛)이 있었다. 조선초기에는 화성시 남양읍 역골중앙로에
                ‘해문역(海門馹)’이 있었고. 조선후기에는 화성시 마도면의 역말에 ‘구화역(仇火驛)’이 있었다.

                 해문역(海門馹)은 남양부의 치소와 가까운 남양읍 장덕리에 있었다. 남양만 화성호의 적진포
                (赤津浦)에 이르는 길목에 위치하였다. 이 지방에서 거둔 조세 등의 물류를 도성 한성의 경창(京
                倉)으로 나르던 역(馹)이었다.

                 구화역(仇火驛)은 화성시 마도면 석교리의 역말에 있었다. 서신면 용두리의 영종포(永宗浦),
                서신면 전곡리의 은수포(銀樹浦), 송산면 고포리의 마산포(馬山浦)로 이어지는 갈림길에 있었

                다. 그 위치는 지금의 마도면 마도(麻道) 삼거리이다. 이 지방에서 거둔 조세 등의 물류를 도성
                한성의 경창(京倉)으로 나르던 역(驛)이었다.
                 해문(海門)은 화성시 마도면 해운로 794의 청원초등학교 부근을 가리킨다. 이 지역은 좌우

                로 바닷물이 들이미는 좁은 고개이다. 병목처럼 생겼으므로 일명 성목쟁이로 불렸다. 이 일대에
                ‘성목쟁이성’으로 불리던 토성이 있었다.
                 조선시대 남양부에 세워진 역(馹,驛)은 시대에 따라 그 위치가 바뀌었다. 남양만 화성호의 포




                                                               원효가 成道한 당주계 樴山의 토굴무덤  151
   148   149   150   151   152   153   154   155   156   157   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