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8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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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장용영 병력을 외영으로 독립시켰다. 같은 해에 도호부였던 수원을 유수부로 승격시켰다. 유

               수부로 승격과 장용영 외영의 설치로 화성을 건설하기 위한 여건이 모두 마련되었다. 이에 앞
               서 장용영은 1792년에 장마로 성벽이 무너진 독산성을 크게 정비했다. 독산성은 화성과 ‘기각지
               세’를 이루므로 반드시 함께 살펴야하는 성곽이다. 독산성의 지휘관을 종2품의 장용영 중군에게

               맡긴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장용영 외영은 훈련도감과 같은 규모인 5,000명의 병력을 갖추게 되
               었다.

                10년을 계획했던 성역이 3년 만에 완공한 까닭으로 흔히 세 가지를 꼽고 있다. 첫째는 임금
               제, 둘째는 구역별 실명제, 셋째는 거중기를 비롯한 신식 장비의 활용이다. 여기에 덧붙일 것은
               화성 축성에 5,000명에 달하는 장용영 외영의 최정예 군사조직이 동원되었다는 사실이다. 화성

               건설의 핵심인 장용영 외영은 신도시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장용영 병사들이 화성 밖 너른 들판
               을 둔전으로 개척하고 이를 경작하여 얻어낸 수확물로 운영 경비를 마련하였다. 화성 운영에 필
               요한 재원도 둔전이라는 국영농장의 운영, 곧 지리(地利)에서 찾아냈던 것이다.








               Ⅳ. 정조의 성곽론





               1. 유형의 성과 무형의 성



                정조는 성(城)을 이렇게 설명했다.
                “성이란 옛사람들이 갑작스런 난리에 대비하려는 목적에서 쌓은 것이다. 그러나 민심을 껴안

               는 것은 무형(無形)의 성이고 성을 높이 쌓는 것은 유형(有形)의 성이다. 3천명이 한마음이었기
               에 주나라 무왕은 성을 쌓아 흥했고, 장성을 만 리나 쌓아 난을 대비했으나 진시황은 그 때문에
               망했다. 명철한 제왕들이 하나같이 무형의 성을 앞세우고 유형의 성을 뒤로 돌린 진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7)





               27) <홍재전서> 제118권 경사강의(經史講義) 당 덕종(唐德宗)
                   城者古人所以築斯待暴之意。然拱以衆心。無形之城也。屹彼崇墉。有形之城也。故三千同心。周武所以築斯而興。萬里延袤。秦皇所以待暴
                而亡。則聖帝明王。未嘗不先無形而後有形者。亶在是矣。



               106  김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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