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4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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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반계수록>은 이이의 <성학집요>, 허준의 <동의보감>과 함께 조선 후기 지식인들에게 가

               장 유용한 책으로 평가를 받았다. 영조의 명으로 경상감영에서 출판한 <반계수록>은 관료와 선
               비들 사이에 널리 읽혀졌다. 정조도 <반계수록>의 애독자였다. 유형원은 평상시 축성하는 목적
               이 전시에 요새로 사용하기 위해서이나 우리나라 성은 요새는커녕 버려지는 성이 되어버렸다고

               탄식하였다. 그래서 지형, 인구, 물산 등을 고려해 몇 개 고을을 수용하도록 넓고 높고 견고하게
               축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형원이 <반계수록>에서 수원의 읍치를 평야로 옮기면 내를 끼고 지세에 따라 읍성 쌓기에
               적합하다고 주장한 것은 대단한 탁견이다. …유형원의 <반계수록>에 수원 읍치를 북평(北坪)으
               로 옮기고 성지를 건축하자는 논의가 있는데, 100년 전에 미리 이러한 논의를 하여 마치 오늘날

               의 일을 본 것처럼 한 것은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16)
                그러나 당시의 조선 사정을 비춰볼 때 읍치를 이전하여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대규모의 토
               목공사를 벌이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엄청난 경비를 어떻게 충당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

               였다. 게다가 정조의 개혁정책에 의구심을 갖고 불안해하는 노론 벽파들을 설득해야 했다. 그런
               데 유형원은 축성하는 공역에 드는 비용은 향군들이 번(番:근무)을 정지할 때 내는 돈을 이용해
               야 할 것이라며 비용 마련의 방법까지도 <반계수록>에 제시해 놓았던 것이다. 정조는 유형원의

               혜안에 거듭 감탄했다.
                “기이하도다. 그가 수원의 형편을 논함에 있어서 읍치를 옮기는 계획과 축성하는 방략은 100

               년 전에 살았으나 오늘날의 일을 환히 알았고, 면을 합치고 번을 쉬게 하는 등 세부적인 부분까
               지도 부절처럼 착착 들어맞는다. …이 화성 한 가지 일만 보아도 나로서는 아침저녁으로 그를
               만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7)

                이처럼 정조는 <반계수록>라는 책을 통해 유형원이 지리(地利)에 기초하여 대도회를 설계한
               인문지리의 정수를 배웠던 것이다.


               2. 수원의 재발견, 화성 건설의 철학



                고려시대부터 중요한 읍치로 관리되었던 수원은 1636년 병자호란 이후 한양을 보호하는 군사
               도시로서의 역할이 더해지게 되었다. 경기도의 핵심 읍치를 이전하는 일은 명분만으로는 실행





               16) <일성록> 정조 17년 12월 기사
               17) <일성록> 정조 18년 12월 10일



               102  김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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