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2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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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 이후 청의 요구로 남한산성의 주요한 시설물을 우리 손으로 허물어야 했다. 숙종 때 다시 설

               치했으나 사신이 사냥을 핑계로 남한산성을 둘러보다가 한봉에 성가퀴가 설치된 것을 확인하
               고 화의조약을 위반했다며 압박하여 당시 수어사 민진후가 허물어야 했다. 한동안 방치해 두다
               가 청의 간섭이 시들해진 영조 때 수어사 조현명이 다시 쌓았다. 이처럼 병자호란 이후 남한산

               성조차 청의 압력으로 허물고 쌓기를 반복했던 것이다. 정조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가 한봉
               에 올라 대포를 쏘아 남한산성 행궁의 기둥을 맞췄던 사실을 거론하며, 산성 안을 굽어볼 수 있

               는 한봉에 성을 쌓아 적이 먼저 점거하는 것을 막아야한다고 강조했다. “산성의 주봉인 남장대
               는 한봉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영조 때 이곳에 100명을 배치할 수 있는 돈대를 두 개 쌓았다.
               두 곳을 힘써 지키면 남한산성과 기각의 형세를 이룰 수 있다.” 이처럼 구체적인 사실을 거론하

               며 지리의 중요성을 강조한 후 지리에는 인화가 따라야함을 말했다.
                “옛사람이 지리가 인화만 못하다고 하였다. 비록 이런 천참(天塹)의 성이 있더라도 인화가 없
               다면 어떻게 보존하여 지키겠는가?”          13)

                1779년 8월 9일 밤 정조는 남한산성 서장대에 올라 주간 군사 훈련인 성조(城操)를 지휘했다.
               성조 후 정조는 대신들과 수어사 서명응과 동행하여 성 안팎을 둘러보며 지리의 이로움과 유비
               무환을 강조했다. “이제 비록 태평한 세월이 오래 되어 나라 안이 안녕할지라도, 편안할 때에

               위태한 때를 잊지 않는 도리로서는 군신 상하가 서로 경계하고 힘써야 할 바이다.” 성을 다 둘러
               본 다음에도 지리와 인화를 말했다.

                “성이…참으로 급할 때에 믿을 만하다마는, 당초에 한번 적과 결전하지 못하고 마침내 성이
               떨어지는 치욕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대개 지리(地利)를 믿을 만하지 못한 것이 이와 같다. 그러
               나 …지리와 인화(人和)가 다 그 마땅한 것을 얻었다면 어찌 청나라 군대를 걱정하였겠는가?”

                이날 정조는 산성의 백성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는 정사가 필요하다며 폐단을 바로 잡을 방
               안을 건의하라고 했다. 수어사 서명응이 산성 백성에게 폐단은 보휼고의 빚돈이라고 하자 정조

               는 “백성을 살리고 개혁하기 위한 일”이라며, 백성들의 빚돈을 탕감해 주고 문권을 쌓아놓고 불
               사르도록 했다.



               6. 정조의 스승 서명응의 지리학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정조와 산성을 순회하며 병자호란 당시의 전투상황을 살폈




               13) 정조 3년 8월 9일 1779년



               100  김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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