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7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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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한 것은 지리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

                 인문학적 관점에서 화성을 보면 지리(地利)와 인화(人和)의 행복한 만남으로 이루어진 건축물
                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지리, 곧 땅의 이로움을 온전히 살리려면 반드시 인화가 뒷받침이 되어
                야 한다. 현륭원 이장과 화성 건설은 풍수지리와 병학의 지리가 빚어낸 문화유산이다.








                Ⅱ. 지리에 대한 정조의 생각





                1. 남한산성의 지리



                 1779년 정조는 효종의 120주기를 맞아 여주 영릉으로 특별한 능행을 떠났다. 이 행차에는 여
                러 가지 정치적 의미가 담겨 있다. 영릉을 참배하기로 결정한 사실을 밝히면서 정조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의 무비(武備)는 요즈음 더욱 허술해져서 백성은 북치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군병
                은 앉고 일어서고 나아가고 물러서는 절차를 알지 못하는데 하루 이틀 세월만 보내니, 병자란

                때의 일을 생각한다면 군신 상하가 어찌 이처럼 게으를 수 있겠는가? 날은 저물고 길은 머니[일
                모도원日暮途遠], 성조(聖祖:효종)께서 이 때문에 조정에서 탄식하셨고 선정(先正:송시열)께서
                이 때문에 상소에 여러 번 아뢴 것이다. …더구나 이 해를 당하여 효종께서 성취하시지 못한 지

                사(志事:북벌)를 우러러 생각하니, 못 견디게 강개하고 격앙된다. …이 기해년을 당하여 영릉에
                가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천리(天理)와 인정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겠는가?”                     5)

                 정조는 7박8일의 영릉 행차 중에 무려 4일을 남한산성에서 보냈다. 나흘 동안 병자호란 당시
                의 전적지를 답사하고, 주간 군사 훈련인 성조(城操)를 지휘했으며, 군사를 대상으로 무과를 시
                취하고, 관에서 양식을 빌린 백성들의 이자문서를 쌓아 놓고 불태우는 행사를 벌였다. 1779년

                기해년의 영릉 행차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르기 위한 1795년 을묘년의 원행과 여
                러모로 비교되는 행차였다. 정조는 남한산성에서 대신과 장수들을 이끌고 병자호란 당시 전투
                가 벌어졌던 현장을 직접 둘러보며, 왜 승리하고 패배했는지를 전략적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5) 정조 3년 8월 3일 17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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