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9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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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皇城: 자금성)은 주위가 가로로 뻗쳐 있어 몇 리나 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큰 바위를

                다듬어서 네 모퉁이에 이를 맞물려 (성벽을) 쌓았고 돌이 맞물리는 틈에는 용철로 가운데를 꿰
                뚫었으며, 외면에는 유회를 발라 전연 틈이 없었습니다. 높이는 10장이 넘었고 넓이는 다섯 필
                의 말을 용납할 수 있었습니다.”        8)

                 이 짧은 대화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청나라의 자금성은 웅장하고 견고한 난공불락의 철옹성
                이었다. 정조는 신하로부터 입수한 정보 중에서 조선에서 실행할 만한 제도는 중앙의 오군영에

                서 먼저 실험해 보도록 시켰다. 성곽에 벽돌을 사용하는 것도 군영에서 먼저 실험했다. 정조는
                어떤 것이 조선의 현실에 가장 절실하고 도움이 되는 제도인지를 살피도록 했다. 이를 위해 청
                나라의 제도를 모방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 중 하나가 신작로의 건설이다. 당시 조선의 도

                로는 폭이 좁고 울퉁불퉁하여 수레가 다니기 힘들었다. 정조는 수원 현륭원을 조성하면서 한양
                에서 수원으로 이어지는 시흥대로를 건설했다. <원행을묘정리의궤>를 비롯한 기록화에서 12명
                의 병사와 다섯 마리 말이 횡대로 시흥대로를 행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안양시에 있는 만

                안교를 통해 신작로의 너비를 확인할 수 있다. 정조의 지리에 대한 인식과 개혁정신을 담고 있
                는 시흥대로는 1번 국도가 되었다. 조선 최고의 개혁가로 아려진 박제가가 <북학의>를 통해 정
                조에게 건의한 것이 벽돌 사용과 도로 건설과 수레 사용의 세 가지이다. 정조는 수레 사용은 늦

                추었으나 앞의 두 가지를 실행에 옮겼다.



                3. 돌과 기와, 그리고 벽돌


                 정조는 남한산성에서 성벽을 쌓은 총융사 이서(李曙,1580~1637)의 이름을 여러 차례 언급하

                며 공을 칭송했다. 무신으로서는 최초로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여러 개의 산성을 수축하고 청나
                라의 침입에 대비했던 이서와 함께 팔도의 승려들을 이끌고 남한산성의 성벽을 쌓았던 팔도도

                총섭 각성(覺性, 1575~1660)의 수고도 기억했다. 각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승병을 이끌
                고 참전했던 의승이며 북한산성의 축성도 총괄했던 당대 최고의 축성 전문가였다.
                 숙종 대에 수어사 민응수(閔應洙, 1684~1750)가 남한산성을 중수할 때 은폐시설인 성가퀴(女

                墻 또는 垜)의 돌 벽돌을 철거하고 기와를 씌웠다. 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하는 성벽의 핵심 시
                설에 기와를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서명응이 1779년에 남한산성을 수리하면서 민응수가 입힌
                낡은 기와를 철거하고 벽돌로 쌓았다. 벽돌을 사용한 것은 광주에 사옹원 분원을 비롯한 도자기




                8) 정조 4년 11월 27일 17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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