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8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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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와 관련된 특별한 사업도 이루어졌다. 정조가 남한산성을 방문하기 직전에 산성을 크게

               보수했던 것이다. 이 사업은 남한산성을 관할하던 수어사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이 주관했
               다. 남문인 지화문(至和門)을 비롯한 사대문을 새로 건축하고 서명응이 편액까지 썼던 사실을
               통해서도 공사의 의미와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정조는 남한산성에서 서명응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이곳의 형승(形勝)은 천험(天險)이라 할 수 있다마는, 무비(武備)가 닦이지 않아서 한 번 전란

               을 당하면 수습하지 못하니, 어찌 지리(地利)가 부족한 것이겠는가?”                  6)
                정조는 남한산성의 지리적 조건이 매우 좋지만 무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에
               서 패배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강한 외적이 공격해도 허물어지지 않는 튼튼한 성곽을 어떻게 쌓

               을 것인가? 정조는 이에 대한 해답을 인화에서 찾았다. 백성들과의 사이에서 인화는 양반사대
               부의 재물을 덜어내 가난한 백성들에게 보태주는 나눔에서 이루어지고, 관료들과의 사이에서
               인화는 공정한 인사와 분명한 논공행상에서 이루어진다.                 7)



               2. 지리의 이상과 현실



                정조(正祖, 1752~1800)는 이상주의자인 동시에 현실주의자였다. 청을 복수해야할 나라로 규
               정했으면서도 동시에 조선보다 문물이 앞선 사실을 인정하고 배워야할 나라로 인정했던 것이

               다. 건륭제가 <사고전서>를 간행했다는 소식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정조는 신하들에게 이 거질
               의 책을 반드시 구해 올 것을 지시했으나 구하지 못하고 대신 <고금도서집성>을 구입해왔던 일
               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만주족은 임진왜란 전만해도 명과 조선의 사이에 끼어 분열되어 부족끼리 서로 싸우던 변방
               의 약소민족이었다. 그러나 부족을 통일한 청은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무력으로 눌렀다. 청

               은 이때로부터 채 10년도 되지 않은 1644년에 자신들보다 100배가 넘는 한족의 명나라를 제압
               하고 100년이 넘도록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정조는 욱일승천하는 청나라의 저력에 군사력
               이 뒷받침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팔기제도와 성곽제도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1780년 북경에 갔다가 돌아온 부사 정원시에게 물었다.
                “그 나라의 성곽과 참호의 제도가 어떠한가?”





               6) 정조 3년 8월 7일 1779년
               7) 정조는 이러한 양반사대부들이 솔선수범으로 보여야할 미덕을 <주역>에 나오는 ‘손상익하(損上益下)’라는 말로 풀이하고 있다.



               96  김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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