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3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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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수어사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은 세손시절 정조의 스승이었다. 북학파의 비조로 불리는

                서명응은 1778년 연행사 정사로 박제가(朴齊家, 1750~1805)를 북경에 데려가 중국의 선진문물
                을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박제가가 귀국 후 <북학의>를 짓고 서명응에게 보여주자 서문을 써
                주었다. 서명응은 <북학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성곽과 주택, 수레와 기물은 어느 것 하나 그에 합당한 규격과 제작법이 없을 수 없다. 규격
                과 제작법을 제대로 갖추면 견고하고 완전하여 오래 사용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아침에

                만든 것이 저녁이면 벌써 못쓰게 되어 백성과 국가에 끼치는 폐해가 적지 않다. …이 책에서는
                                                                      14)
                규격에 대한 기술이 상세하고, 제작법에 대한 규명이 명료하다.”  북학파에 커다란 영향을 끼
                친 서명응의 학문은 아들 서호수와 서형수, 손자 서유구에게 가학(家學)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모두 정조의 최측근 관료로 활약했다.







                Ⅲ. 인화와 지리의 만남





                1. 반계수록과 정조



                 정조가 수원 읍치를 북쪽 들판에 위치한 팔달산 주변으로 옮기고 화성을 건설하게 된 것은 반
                계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의 영향이 크다. 100년 전인 17세기 후반에 반계 유형원은 이렇

                게 주장했다.
                 “수원도호부는 광주(廣州) 아래 지역인 일용면 등을 더하고 읍치를 북평의 평야로 옮겨 내를

                끼고 지세를 따르면 읍성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가 규모 있는 읍치와 뛰어나게 좋은 평
                야를 더하면 참으로 큰 번진(藩鎭)이 될 기상이 있는 곳으로, 안팎으로 1만 호는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15)

                 정조는 유형원의 혜안에 감탄하며 신도시를 건설할 설계도를 정약용에게 맡겼다. 알려진 것
                처럼 실학의 비조로 불리는 반계 유형원의 학문은 성호 이익을 거쳐 다산 정약용에게로 전승되





                14) 박제가 저, 안대회 역, <북학의>, 서
                15) <반계수록> 보유편


                                                                   지리와 성곽에 대한 정조의 생각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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