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6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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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여를 지불하여 축성한다는 방침을 분명히 했다.

                1794년 정월, 정조는 팔달산에 올라 성 쌓을 터를 두루 살펴본 후에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이 성을 쌓는 것은 장차 억만 년의 유구한 대계를 위함에서이니 인화(人和)가 가장 귀중한 것
               이다. 또 먼 장래를 생각하는 방책을 다해야 하는데, 아까 성터의 깃발 세운 곳을 보니 성 밖으

               로 내보내야 할 민가가 있었다. 어찌 이미 건축한 집을 성역 때문에 철거할 수 있겠는가. 이는
               인화를 귀중히 여기는 뜻이 아니다.”          20)

                본래의 설계도에서 더 넓혀 성벽을 건설하도록 결정했다. 인화를 소중히 하는 정책은 이어졌
               다. 성역을 시작한 해 가을에 흉년이 들자 정조는 성곽 공사를 정지하라는 윤음을 내렸다. 이때
               한글로 풀이한 윤음도 함께 내걸어 한자를 모르는 일꾼들도 공사를 중지하게 된 까닭을 훤히 알

               수 있도록 배려했다.
                “수원성의 공사가 중요한 점이 있기는 하나 그것을 정지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다. …이제
               말하기를 ‘우선 너희들의 농사짓는 것과 진휼하는 일은 놔두고 나의 성 쌓는 일에 종사하라.’ 한

               다면 인화(人和)와 지리(地利)의 면에서 보더라도 그 경중의 구분이 아마도 이와 같아서는 안 될
               것이다.”  21)
                “5개 읍이 지리적으로는 더없이 유리한 곳이지만 그보다 앞서야 할 것은 인화이다.”                       22)

                정조는 여름에 더위를 물리치는 척서단을, 겨울에는 추위에 견딜 수 있는 목도리(이엄)를  화
               성의 공사현장에 내려줄 정도로 지리와 인화의 조화를 소중히 했다.                    23)



               3. 인사와 지리



                화성을 한양 다음의 대도회로 성장할 수 있는 여건도 조성되었다. 서울과 가깝고 삼남으로 통
               하는 교통 요지라는 수원의 지리(地利)를 최대한 활용한 것이다. 성 안을 상업특구로 만들어 상

               인을 모집하고, 성 밖의 너른 들판에 국영농장인 둔전을 대규모로 건설해 백성들에게 좋은 조건
               으로 빌려주었다. 이러한 정책이 뒷받침되면서 화성이 소비도시인 한양과 달리 자급자족의 도
               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정조는 농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좋은 생각을 올리라는 윤음(綸音)에서

               도 지리를 강조하고 있다.



               20) 정조 18년 1월 15일 1794년
               21) 정조 18년 11월 1일 1794년
               22) <홍재전서> 군제인(軍制引)
               23) 정조 18년 6월 28일 1794년



               104  김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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