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7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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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산이 많은 데다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들판이 대부분 기름져 평소 의식이 풍족한

                지역이다. 그러나 농사짓는 방법을 잘 모르고 나태한 것이 습관처럼 되어 농사짓는 시기를 놓치
                고 있는 데다, 홍수나 가뭄이라도 들면 흉작을 면치 못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인사를 제대로
                닦지 못하여 지리(地利)를 극진히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4)

                 “백성들이 농사지음에 있어서는, 비록 천시(天時)를 따라야 하나 마땅히 지리(地利)를 다하여
                                                                                             25)
                야 하며, 비록 지리에 의지한다 하더라도 마땅히 사람이 해야 할 일을 다하여야 하는 법이다.”
                 지리는 인사와 만나야 그 이점을 발휘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다. 화성 건설을 결심한 정
                조는 특별한 인사를 단행했다. 수원을 유수부로 승격하고 초대 유수로 정승을 지낸 채제공을 임
                명한 것이다. 정조의 마음을 읽고 수원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채제공이 화성 건설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정리한 <축성방략(築城方略)>이라는 글을 올렸다. 정조는 원로의 헌신적인 자세에 감동
                하여 “성역의 성공 여부는 오직 (그대가) 감독을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에 달려 있다”면서 채제
                                                   26)
                공에게 최고의 벼슬인 영의정을 제수했다.  채제공과 조심태, 이유경을 수원에 배치한 정조의
                인사가 수원의 지리를 최대한 살리는 화성 축성으로 연결된 것이다.


                4. 승평을 이루는 장용영



                 18세기는 한중일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대였다. 당시의 용어로 평화를 ‘승평(昇平)’이라 하

                였다. 100년 이상 외침이 없는 승평이 이어졌으나 정조는 자신의 시대를 근본적 변화가 필요한
                ‘경장(更張)의 시대’로 파악하고 이에 따른 국정과제를 제시했다. 1778년에 밝힌 ‘경장대고’에서
                내세운 것은 민산(民産), 인재, 융정, 재용(財用)이다. 인화가 인재(人才)를 고르게 선발하는 것

                과 관련된다면, 지리는 융정(戎政)과 가장 관계가 깊다. 정조가 재위하는 동안 군제의 정비와 국
                방 강화를 줄기차게 추진했던 배경에는 인화에 기초한 정조의 현실 진단과 상무 철학이 들어있

                다.
                 화성 건설을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장용영 외영의 역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789년 현
                륭원을 이장한 이후에 3초(약 360명)의 병력을 수원 출신의 장관들에게 맡겨 현륭원과 행궁을

                호위하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매년 병력을 늘려나가 불과 4년이 지난 1793년에 수원에 주둔하





                24) <일성록> 정조 22년 11월 29일
                25) 정조 22년 11월 30일 1798년
                26) 정조 17년 5월 25일 1793년


                                                                   지리와 성곽에 대한 정조의 생각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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