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1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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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을 사람의 몸통으로 비유하는 정조의 발언의 핵심은 백성이다. 안으로 덕을 쌓아 많은 백

                성을 살게 한다는 것은 곧 인화(人和)를 말하는 것이며, 밖으로 번방을 튼튼히 하여 적을 방어한
                다는 것은 지리(地利)를 말하는 것이다. 수와 당의 침략으로부터 안시성을 지켜낸 것도 지리에
                의존한 것이지만 인화가 베풀어졌기 때문에 가능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10년 예정했던 공사를

                불과 3년 만에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인화를 중시하는 정책을 일관되게 폈기 때문이다.



                4. 화성에 반영된 정조의 미학


                 “한갓 겉모양만 아름답게 꾸미고 견고하게 쌓을 방도를 생각하지 않으면 참으로 옳지 않지만,

                겉모양을 아름답게 하는 것도 적을 방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병법(兵法)에 상대방의 기를 먼
                저 꺾는 것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소하(蕭何: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운 개국공신)는 미앙궁
                (未央宮)을 크게 지었고, 또 말하기를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 수 없다.’고 하였

                다. 그렇다면 성루를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며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가 꺾이게 하는 것도
                성을 지키는 데에 있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31)
                 정조는 성곽 전체의 구조와 중요한 시설물에도 세밀한 관심을 보였다. 특히 화양루, 방화수류

                정, 동남각루, 서남각루의 네 개 각루는 정조의 견해를 반영하여 건설한 것으로 보인다.
                 “평지 외에 산에 의지하는 곳이나 지형에 따라 굴곡진 곳은 성가퀴를 설치할 필요가 없다. 성

                가퀴를 만들 수 없는 네 모서리에는 대(臺)를 설치하거나 누(樓)를 쌓고 포(舖)를 쌓는다면 보기
                에도 아름답고 성 밖의 형세를 살피기에도 편할 것이다.”
                 정조는 성벽의 윗부분은 처마처럼 만들고, 아랫부분은 돌다리처럼 쌓도록 지시했다. 규(圭)는

                화성을 쌓으면서 성벽 전체에 적용한 축성법이다. 수원유수 겸 장용영 대장으로 공사를 총감독
                했던 조심태가 함경도 경성(鏡城)의 성이 이런 방식으로 축성된 사실을 보고했다. 정조도 이 말

                에 깊이 공감하고 특별히 강조했다. “일찍이 들은바 경성의 성이 그 제도가 이와 비슷하여 백 년
                이 되도록 한 번도 무너진 일이 없다고 하니, 이는 반드시 본받을 일이다.” 도청 이유경은 일본
                의 성들도 이와 같음을 보고했다. 이를 통해 조선 경성과 일본에서 사용하는 축성법을 화성에

                적용한 것을 알 수 있다.
                 화성을 건설하면서 가장 많이 참고한 성은 경상도 진주성이다. 정조도 진주성에 대한 관심을
                여러 차례 표명하면서 화성이 진주성보다 더욱 아름답고 튼튼하기를 기대했다. 1794년 초겨울,




                31) 정조 17년 12월 8일 1793년


                                                                   지리와 성곽에 대한 정조의 생각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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