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3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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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맺음말





                 화성을 완공한 이후 정조는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수원성을 쌓으려 하면서 마음으로 많은 계획을 세워 보기도 하고, 또 옛 분들이 했던 일
                들을 많이 참고하기도 했었다. 그리하여 결국 위치 좋은 곳을 얻어 약간 새로운 모양으로 쌓았

                지만 재정도 그리 많이 들지 않았고 농공(農工)들도 데려다 쓰지 않았다. 얼마 안 되는 백성들이
                마음을 합쳐 일해 주었기에 시작한 지 3년 만에 완성을 보았는데, 나는 그 수원을 서울 다음으
                로 생각하고 있다.”

                 지리의 강점을 오롯이 살린 화성은 18세기에 꽃 피운 인문지리학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화
                성은 건축물로서도 아름답지만 공역 과정이 더욱 감동적이다. 여기에 더하여 공사의 전말을 낱
                낱이 기록한 <화성성역의궤>가 화성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정조는 화성의 역사가 마

                무리 된 후인 1796년 9월에 현장의 총책임을 맡았던 수원 유수 조심태에게 의궤 편찬을 지시한
                다.
                 “옛날 사람들은 작은 다리 하나를 세워도 돌에 새겨 그 일을 기록했다. 하물며 이번 성역에서

                랴. 공역이 컸을 뿐만 아니라 소중함이 각별하니 공적을 기록하는 처사가 있어야 하겠다.…성역
                에 소요된 비용이 근 80만 냥이나 되는 막중한 것이니 티끌만큼도 소홀하고 싶지 않은 것이 나

                의 본뜻이다. 이 책을 간행해 만민에게 환하게 성역의 본말을 알게 하라.”                   33)
                 화성의 터 닦기부터 낙성연까지 화성 건설과 관련한 모든 자료를 담고 있는 <화성성역의궤>
                는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의 실학정신이 살아 있는 최고의 공사보고서이다.

                 18세기는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국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지리학자들이 활약했고 우수
                한 지리서와 지도가 제작되었다. 백리척을 활용해 제작한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지도 제작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정상기 이후 지도의 정확성과 편리성은 한층 높아졌다. 가장 많이 읽힌
                인문지리서로 평가를 받는 이중환의 <택리지>도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저작물이다.
                 <동국여지도>와 <팔도지도>를 제작한 신경준의 <산경표>도 이 시대에 완성되었다. 백두대간

                과 13개의 정맥으로 조선의 지세를 살핀 <산경표>는 조선 지리학이 새로운 단계에 올라섰음을
                보여주고 있다. 규장각의 초계문신에 선발되어 정조에게 학문적 자극을 받았던 학자들이 지리
                학에 관련된 기념비적인 저술을 연이어 편찬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정약용의 <아방강역고>와




                33) <화성성역의궤> 권1, 연설 병진년 9월 초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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