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7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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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오산시는 교육의 분야에서 정책을 마련하고 제반 여건을 갖추면서 명실공히 「교육도시」 오산

                시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가 제11회 대한민국평생학습대상(2014)을 수상한
                것이며, 세계적인 평생학습도시의 대표단과 교육 전문가들을 초청해 ‘오산글로벌평생학습포럼

                (2017)’을 개최함으로써 국제적이해를 바탕으로 평생학습도시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있다.
                 그런데 「교육도시」 오산시의 위상은 자치단체장의 정책과 행정의 노력에만 기인된 것은 아니
                라 판단한다. 「교육도시」 로써의 뿌리는 적어도 154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늘날 「교육도시」 오산시는 공서린선생에 연원을 두고있다. 그 자취를 “경기도 기념물 제147
                호. 공서린(孔瑞麟)의 사당인 궐리사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곳은 원래 조선 중종 때의 문신으로
                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낸 공서린이 서재를 세우고 후학들에게 강의를 하였던 곳으로 전해지고

                     1)
                있다.”  연보를 통해보면 공서린선생은 1540년 경 자신이 태어난 생가가 있는 오산에 귀향하여
                                        2)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과 1~2년 정도의 기간이었으나 지역의 아이들을 모아 후학을
                               3)
                양성하였다는 기록 을 통하여 478년전 공서린선생의 정신이 오산시 교육의 정책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공서린선생의 정신은 외삼미리(外三美里) 윤학영(1898~1966)선생의 주도로 해평윤씨

                집안에서 뜻을 모아 95년 전인 1923년 삼미의숙을 설립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삼미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1538년 경기도관찰사, 이듬해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하고, 부제학,사헌부 대사헌을 끝으로 은퇴하였는데, 그 후 고향 중규면(中
                 逵面) 구정촌(九井村, 또는 竹茂村)에서 사당을 세워 후학을 양성하다가 59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출처 – 수원박물관 swmu-
                 seum.blog.me/10123031471 수원박물관 e야기
                3) 조선 전기 문신이자 공자의 64대 손인 공서린(1483∼1541) 선생이 후학지도를 위해 세운 곳으로 지금은 공자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중종 2년(1507) 문과에 급제하고 공조참의, 대사헌 등을 지낸 공서린 선생이 후학을 지도할 때 은행나
                 무에 북을 달아 놓고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 깨우쳤는데, 그가 죽자 은행나무도 말라죽었다고 전한다. 그 뒤 정조가 화산
                 에서 바라보니 많은 새들이 슬피 울며 은행나무 곁으로 모여들었고, 이를 괴이하게 여긴 임금이 가까이 가서 보니 죽은 은행나
                 무에서 새싹이 돋고 있었다고 한다. 정조 17년(1792) 이곳을 공자가 살던 노나라의 마을 이름을 따라 궐리로 바꾸고 사당을 세
                 운 후 ‘궐리사’라고 했다.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00년 다시 세우고 1981년 강당을 세웠으
                 며, 1993년 중국 산동성에서 기증 받은 공자의 석고상을 모셨다. 사당은 앞면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
                 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동쪽으로는 학문을 배우는 공간인 강당 건물이 있어 동학서묘의 전형적인 서원
                 건축 양식을 보이고 있다. 논산의 노성 궐리사와 함께 우리나라 2대 궐리사로서 조선 후기 사당형식을 잘 보여 주는 곳이며,
                 해마다 지방 유림들이 모여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출처 -다음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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