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0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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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보은을 잊지마라(報恩)

                수난 후에 잃었던 선조묘를 과천에 사는 외손들의 지혜로 400년 만에 되찾은 일, 근대사에도
               광복 후 정부수립후의 토지 분배 시에도 강제분배 되는 일 없이 사전에 소작인들과의 은혜를 베
               풀고 다시 6·25전쟁 중에 지주로 몰릴 종손 가족이 피란을 미처 못 하고 은신중 일때 주위에서

               숨겨주고 지혜롭게 위기를 벗어나게 하여준 은혜를 입기도 하였고 반대로 수복 후에는 적치하
               에 부역한자 들을 보호하여 화를 면하도록 도와주었다.



               一. 이웃과 더불어 살라(隣保相助)
                1930년대에는 마을의 60여농가 가운데 자기땅을 갖고 농사를 짓는 집이 5~6가구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는 남의 땅을 소작하며 살아가는 형편이였는데 그들에게 자기땅을 마련하여 주기
               위한 방법으로 자작농계(自作農契)를 조직하여 금융조합에서 융자를 얻어 지주를 설득하여(대
               부분 종친들의 땅) 집에 3마지기(500평정도)씩 자기 농사로 짓게 하고 3년간 거두어들인 쌀을

               마을 공동창고에 보관하며 5일마다 식량으로 배급을 주고 절약하여 3년만에 땅값을 치르게 하
               였다.
                농한기에 화투등 노름을 하지 못하게 하고 가마니짜기등 농외소득을 장려하는등 마을을 낙원

               으로 가꾸어 놓았다.
                천수답의 가뭄을 극복하고자 마을의 계류를 이용하여 수리를 도모할 수 있도록 저수지 2개소

               (鳴鶴池, 芳谷池)를 건설하여 영농사업을 진흥시켜 잘사는 마을을 만들었다. 명학지의 만수면적
               은 1.6ha이고 몽리면적은 18ha이며 방곡지의 만수면적은 1.1ha 몽리면적은 6ha이다.
                그리고 당시 종중 재산을 투척하여 외삼미동 삼미산 장암봉 아래에 사립삼미의숙(私立三美義

               塾)을 창설하고 마을 어린이들의 지식 교육에도 앞장섰으며 스스로 종친들이 강사가 되여 솔선
               수범하기도 하였다. 1926년부터 1945년 광복시까지 운영하다가 국가에 헌납하여 삼미초등학

               교가 되게 하였다. 또 1936년대에는 초등학교 졸업 후 상급으로 진학을 돕고자 농업실습학교를
               설립하여 영농자도자로서 관청에 취직토록 도와 주었다.



               一. 사람답게 살라(仁義.五常)
                드높은 학식과 정치에 큰 업적은 내지 않았으나 보통사람이 수행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도덕
               과 소양을 지닌 모범시민으로서는 손색이 없는 명가문으로 지속된 것이다. 이러한 가풍은 현대

               에도 이어져 일제하 저항이나 친일로 희생된 사람이 없이 은인자중하였고 해방과 6·25전쟁 중
               의 좌우 이념대립에도 한사람도 연루되여 희생됨이 없이 무사하였으니 기적이 아닐 수 없다.




               118  김용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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