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1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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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자수성가 하라(分家)
옛날에는 춘궁기등 가난으로 고생하는 것은 보통사람들의 다반사였으니 이 차자(次子)들도
굶주릴 때가 많았으나 한번 분가하면 재산을 추가로 나누어 주는 일이 없었다. 다만 종가의 행
사인 명절, 제삿날, 생신날 등을 전후하여 작은집 가족들에 그 준비 일을 거들게하여 음식을 함
께 나누어 먹는 것으로 도움을 주고 간접으로 격려하는 풍습이 이어졌다.
외삼미 해평윤씨 집안의 가훈을 통하여 보듯 사리사욕을 챙기고 집안의 경제력을 통하여 지
역의 권력을 거머쥐려하지 않았으며 이웃과 함께 더불어 갈아가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러한 가
풍은 후손들에게 이어졌으며 그 좋은 사례가 윤학영을 통하여 입증된다 하겠다.
“윤학영가에 전해져 내려오는 각종서적을 보면 대학(大學), 중용(中庸), 소학(小學), 계몽편)
啓蒙編, 두시(杜詩), 향례합편(饗禮合編), 근사록(近思錄), 조선사략(朝鮮史略), 동춘당선생)同
春堂先生, 동의보감(東醫寶鑑), 옥오제집(玉吾齊集), 휴암실기(休巖實紀), 대한신지지(大韓新
地誌), 천세력(千歲歷), 조선태조실기(朝鮮太祖實記), 삼국지(三國志) 등으로 윤학영선생께서
도 이런 사료를 통하여 유년시절부터 漢學을 수학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화성궐리지를 통하여
1922년 화성궐리사(華城闕里祠)에서 강학((講學)내용을 점검하는 시험을 치룬 기록으로도 확인
할 수 있다.” 6)
그리고 윤학영은 가문의 가훈과 한학으로만 농촌계몽운동가로서의 가치관이 정립된 것이 아
니었다. 결혼과 함께 신학문을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사회사업으로써
의 구체적 방향을 모색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권태동, 오성선과의 만남이 큰 영향
을 미쳤을 것이라 추정된다.
6) 윤의영의 미발표 원고
三美義塾 設立의 意義 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