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2 - 오산학 연구 4집
P. 122
“그러던 그가 신식교육을 통해 다양한 사상과 지식을 수학하던 용인 서천리 안동권씨 집안의
권귀이씨와 14세가 되던 해 1912년 혼인(婚姻)을 하면서 커다란 환경의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그 커다란 환경의 변화에는 두인물이 등장하게 되는데, 첫 번째로 장인이신 권태화씨의 동생 권
7)
태동(權泰東) 이다. 권태동은 1900년 설립된 관립의학교에 입학하였고 대한의원 교육부를 1회
로 졸업하였다. 한일병합이 되기 전인 1909년 의술개업인허장을 수여받았다. 1913년 수원성내
남창리에 동화의원(소아과,내외과)을 개원한 수원 최초의 조선인 의사로서 일세를 풍미했던 인
물로 해방 전과 후에도 수원의사협의회 회장으로 활동하였고, 가난으로 치료받지 못한 이들을
무상진료 한다는 광고가 현재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기도 하다. 처삼촌인 권태동과는 윤학
영 두사람은 수원지역의 각종 단체에서 같이 활동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교류
를 하게 되었다.
또한 윤학영에게 영향을 미친 두번 째 인물은 우서 오성선이었다. 오성선은 용인군 서천리 출
신이며, 용인군 서천리에는 안동권씨(安東權氏)와 해주오씨(海州吳氏)의 집성촌이 있는 지역이
다. 그러니 처가와 같은 지역에 살던 해주오씨 집안과도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오성선과의 만남
8)
도 그러하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윤학영은 해주오씨가의 중심 인물인 용수흥농주식회사 사
장 우서(又西) 오성선(吳性善)과의 교류가 있었음을 각종문서(삼미의숙 감사장, 용수흥농주식회
사연혁, 주식증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9)
오성선과의 만남이 윤학영에겐 또 다른 커다란 충격 이었을 것이다. 오성선은 1872년생으
로 윤학영보다 26살이나 많다. 1893년 무과에 급제하여 상의사주사, 돈령원주사, 중추원의관을
지낸 인물로 1908년 동양척식주식화사 설립의원으로 추대되어 일본농촌을 시찰후 용수농업연
구회를 시작으로 용수흥농주식회사에 이르기까지 농촌진흥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 인물
7) 수원시사 제7권 수원의 사회 변동과 주민생활 제3부 질병과 의료 p316~319
권태동(1882~1964) 1900년 설립된 관립의학교에 1904년 입학하였고,1907년 대한의원 교육부를 1회로 졸업하였다. 한일병합
이 되기 전인 1909년12월10일 의술개업인허장을 수여받았으며, 인허장 제 14호였다. 1910년8월20일 관립수원자혜의원에 부
임하여 1913년8월30일까지 근무하였다. 1913년9월30일 수원시내 남문 근처에 동화의원을 개원하여 1963년 은퇴할 때까지 수
원지역의 의료보건 증진에 크게 기여하였다.
8) 일제강점기 한국인 지주들만이 설립한 민족회사. 1900년대 후반 일제의 농업정책을 뒷받침하고자 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각종
농회와 농계가 조직이 되어왔다. 그 속에서 용수흥농주식회사는 용인과 수원의 조선인 지주들이 모여 자금을 출자하고 농사개
량과 빈농구제 등에 힘을 기울일 목적으로 ‘용수농계(龍水農契)’를 설립하여 발전시킨 대표적인 조선인 농업주식회사였다.
9) 재단법인 우서문화재단 2017.10.30
오성선(1872~1950) 1893년(고종30) 무과에 급제하여 상의사주사,돈령원주사,중추원의관 등의 관직을 지내 인물로 1908년 동
양척식주식회사 설립의원으로 추대되어 일본농촌을 시찰하면서, ‘조선 농촌의 진흥은 실로 농사의 개량과 金穀의 저리융통에
있다, ’는 깨달음을 얻고 귀국하였다
120 김용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