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8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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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은 농촌계몽을 펼치면서 소작인들의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소작인들에게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기회를 제공하였다.
공서린성생으로부터 윤학영선생에 이르기까지 오산은 오산만의 교육에 대한 철학적, 정신적
뿌리가 있었다고 판단한다. 그러하기에 오늘날 오산시가 전국의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대표적
교육도시로 성장하면서 그 위상을 공공히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윤학영선생의 업적이 얼
마나 크고도 귀중한 것이며 그 정신은 또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살펴봄으로써, 교육도시 오산시
의 위상을 한층 높힐 뿐 아니라, 오산시의 정신적 가치와 철학을 정책에 어떻게 담아야 하는지,
그 바탕을 마련하고자 한다.
이에 윤학영선생의 생애와 일제강점기 오산의 교육환경을 돌아보면서 윤학영선생이 삼미의
숙를 통하여 담고자 하였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윤학
영선생의 주도로 해평윤씨 가문이 설립한 삼미의숙이 어떠한 의의를 갖추고 있는지를 드러내보
이고자 한다.
Ⅰ. 해평윤씨 집안과 윤학영
농촌계몽운동가이자 사회사업가였던 윤학영(1898~1966)의 본관(本貫)은 해평(海平)으로 외
삼미리 출신이다. 윤학영은 궐리사의 중건과 춘후제향을 비롯하여 오산시의 전통을 계승하고
창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산시 사학(私學)의 역사를 이룩한 업적을 세운 인물로 전한다.
먼저 해평윤씨 집안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경기도 오산의 해평(海平) 윤씨(尹氏)는 조선(朝
鮮) 중기(中期)의 문신(文臣)으로 한성부윤(漢城府尹), 예문관제학(藝文館 提學), 황해도관찰사
(黃海道觀察使)를 역임하신 6세 한성윤공(漢城尹公) 윤사영(尹思永)의 후손들이다. 세조원년(世
祖元年 : 1455)에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錄勳) 되시고 성종(成宗) 12년 사헌부집의(司憲府
執義)를 거처 대사헌(大司憲)에 오르신 8세조(世祖) 윤기번(尹起磻)으로 이어졌으며, 통정대부
(通政大夫)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이신 11세 윤응상(尹應祥)이 지방을 순방(巡訪)하게 되었
는데 수원(水原) 삼미곡(三美谷)에 이르렀을때 잠시 머물게 되였는데 그때부터 현재까지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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