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2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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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흉년으로 백성들이 힘들어 하니 성역을 잠시 멈추도록 지시했다. 이때 정조는 진주성이

               임진왜란 당시 유성룡이 중국의 성제를 모방하여 쌓은 것이라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화성도 진
               주성을 모방하여 견고하고 완전무결하여 영원히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이지 속히 완공하는 것
                                         32)
               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고 했다.  진주성보다 튼튼하고 아름답게 짓는 것이 최대 과제였던 것
               이다. 정조는 진주성에 있는 초루가 좋다는 말을 듣고 조심태에게 직접 살펴보고 오도록 지시했
               다. 조심태는 성곽 제도에 밝은 함안 군수 심인을 추천하여 진주에 가서 살펴보고 도형을 만들

               어 오도록 했다. 공사가 한창이던 1795년 윤2월, 서장대에 올라 화성을 둘러보던 정조가 감탄했
               다.
                “들으니 화성의 제도와 모양이 진주성과 비슷하다고 하는데 그곳이 이처럼 지극히 아름다운

               지는 보장하지 못하겠다.”
                군신이 한마음으로 정성을 쏟은 결과 화성은 진주성보다 더 아름다운 성으로 축성되고 있었
               던 것이다. 이처럼 화성은 지리와 인화의 바탕에 이용후생의 정신을 결합한 정조의 미학이 살아

               있는 건축물이다.






































               32) <일성록> 정조 18년 10월 19일




               110  김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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